노강서원과 박태보의 묘

한강이야기 2013. 7. 15. 15:24 Posted by 조영희

노강서원이다. 원래 김시습의 영당인 청절사(淸節祠)가 있던 자리였다.
기사환국 때 인현왕후의 폐위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진도로 귀야가는 길에
노량진에서 순절한 박태보를 기리기 위해 노량진에 건립한 노강서원이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도 살아남은 47개 서원 중 하나였으나
1950년 한국전 때 소실되었다.
1967년 아버지 서계 박세당이 은거한 의정부시 장암동 석천동 수락산 자락으로 옮겼다.
위패를 모시고 있는 사당은 정면 3칸 건물로 맞배 지붕을 했으며 양옆에 동재와 서재가 있다.

경내 건물로는 사당, 동재·서재, 고직사 등과 출입문이 있다.
교육장소로 사용되는 강당은 따로 두지 않았다.
사당은 박태보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건물로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으로 꾸몄으며,
각 칸에는 4짝으로 이루어진 문을 달았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새 날개 모양의 익공 양식을 사용하였다.
가운데 칸에 용머리를 첨가하였다.
동·서재는 온돌방으로 꾸며 유생들이 공부하면서 기거하는 건물이다.
앞면 3칸·옆면 1칸 규모로 앞에는 툇마루를 두었다.
해마다 3월과 9월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13만평이나 된다는 반남 박씨의 문중 묘역이다.
묘역 맨앞 좌측에 박태보의 묘가 있다.

박태보의 묘 건너편에는 서계 박세당의 묘가 있다. 방형(사각)의 묘다.
서계 박세당의 묘는 정경부인 의령남씨와 광주정씨를 함께 묻은 세분의 합장묘다.
첫부인 의령남씨는 남일성의 따님으로 약천 남구만(南九萬)은 서계의 손아래 처남이였다.
청구영언에 남아 있는 남구만의 시 한수 초등학교때 부터 교과서에서 배웠던 시가 생각난다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소치는 아희놈은 상기아니 일었느냐
재너머 사래긴밭을 언제갈려 하나니"

 

 

조선의 문신 박태보가 귀양간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거리 거리는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루었다.
조선 제일의 충신의 얼굴을 한번이라도 보겠다는 것이었다.
박태보는 숙종 때 문신으로 왕이 장희빈을 불러들여 왕비를 삼고 인현왕후 민씨를 폐출할 때
정면으로 간하다가 잡혀 참혹한 형벌을 받고 죽은 조선의 대표적인 선비이다.
종묘 제향에 향로를 반드는 봉로관이 되었을 때 으레 물수건으로 싸서 드는 법이건만
나랏일에 약간 뜨겁다고 싸서 들다니 말이 되느냐고 맨 손으로 들었다고 한다.
누릿한 냄새가 나기에 왕이 돌아다 보니
박태보의 향로든 손 끝이 타서 노란 연기가 오르는데
눈썹 하나 까딱 않더라는 그런 분이다.
 "너는 요놈 뜨거운 것 잘 참더구나"
숙종은 중전을 폐위하는 것을 간 했을 때도 친국하는 자리에서
인두를 달궈 단근질을 해서 역사상에 드문 참혹한 형벌을 가했다.
”세상에 저럴 수가!”
박태보의 짓이겨진 처참한 얼굴을 보고 사람들은 말문을 잃었다.
곳곳에서 통곡이 터져 나왔다.
남자들은 박태보의 가마를 서로 메겠다고 나섰다.
한강건너 노량진에 있는 사육신 묘지 부근에 다다랐을 때다.
박태보는 고문으로 생긴 상처가 터져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그는 아버지 '박세당'과 아들을 불렀다.
아버지와 아들은 한동안 말 없이 눈물만 떨구고 있었다.
그러더니 박세당이 아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너는 다시 회복될 것 같지 않구나.
여기서 조용히 죽어 네 충절을 나타내는 게 옳은 일이 아니겠느냐?”
박태보의 눈에서도 한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버님 분부대로 따르겠습니다.”
아버지 박세당이 울면서 한강을 건너는 것을
하염없이 지켜보던 박태보는 얼마 후 숨이 끊어졌다.
그의 마지막은 한 여인이 지켰다는 전설이다.
박태보는 어려서부터 슬기롭고 또 얼굴이 남중일 색(男中一色)이었다.
어느 날 참판 이종염(李宗燁) 집에 심부름하는 여인 하나가
그의 아름다운 모습에 반하여 박태보의 유모에게 이 사실을 알리자,
유모가 그 사정을 딱하게 여겼으나 박태보의 심지가 곧으므로
차마 입을 열어 볼 수가 없어 그의 모친에게 이야기를 해보았다.
그의 모친 역시 그 여인의 짝사랑을 동정하여
남편 서계(西溪) 박세당에게 아들을 좀 달래보라고 청하였다.
아버지 박세당이 박태보를 불러 여인에게 한을 남기면
앞으로의 길에 장애가 될 것이라 훈계하였다.
박태보도 부친의 뜻을 거역하지 못하였다.
그 여인은 박태보의 양친을 뵙고 스스로 머리를 쪽 지어 출가한 부녀처럼 하고 다녔다.
세월은 흘러 박태보는 그 뛰어난 재주로 벼슬길에 올랐고 여인은 그의 기억에서 차츰 멀어졌다.
숙종 15년(1689) 중전에 대한 장희빈의 끈질긴 모함이 성공하여
왕이 중전을 폐비하려 하자 직언(直言)을 잘 하던 박태보는 이 소식을 듣고
붓을 들어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진도로 귀양을 가게된다.
귀양지로 가는 길에 국문 시 입은 장독(杖毒)과 화상 (火傷)이 심해
친구 집에 있는 노량진에 머물렀다.
이때 어느 여인이 와서 박태보를 한번 뵈옵기를 청하였다.
방문객은 바로 전일에 박태보를 사모하여 혼례식도 올리지 않고
출가한 부녀자처럼 쪽을 지고 다니던 그 여인이었다.
박태보는 멀어져 가는 정신을 간신히 수습하여
겨우 손을 들어 여인의 손을 한번 꽉 잡은 다음 그만 목숨이 다했다.
여인은 그 앞에서 울고 또 울다가 일어나 나갔다.
그 후 인현왕후가 복위되고 노강서원이 완성되던 날,
그 여인은 소복을 입고 서원 뒤 서까래에 목을 매어 달아 싸늘하게 죽었다고 한다.

 

 옛날에는 한강 노들나루 근처 언덕으로 빼어난 경치를 자랑하던 명소였다.
세월이 흘러 그 언덕은 헐리고 절경을 뽐내던 강가 그 명소는 육중한 아파트군(群)에 자리를 내주었다.
아파트 동과 동 사이로 한강이 보이고 강 북녘에도 거대한 아파트가 버티고 시야를 가리고 있다.
청산 자부송(自負松)아 네 어이 누엇난다/
광풍을 못 이긔여 불희져저 누엇노라/
가다가 양공(良工)을 만나거든 날 옛다라 하고려/
조선 숙종 때 명신 박태보(朴泰輔)가 남긴 시(詩)이다.
옛 스타일의 그의 시를 현대문으로 바꾸어 보았다.
푸른 산 속에서 비뚜름하게 누워 있는 소나무야/
 어는 어찌해서 그렇게 누워 있느냐?/
사나운 바람을 못 이기어 뿌리가 뒤로 기울어져 누워 있다./
그러니 가다가 솜씨가 좋은 목수를 만나거든 내가 여기에 있다고 하여라!/

 1695년(숙종 21)에 지방 유림의 공의로 숙종 15년의 민비 인헌왕후 폐출 때
죽음으로써 이를 충간(忠諫)하였던 박태보(朴泰輔)다.
그를 기리기 위해 노들나루 근처 한강가 지금의 유원아파트 103동 앞에
노강서원을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그 자리에는 노강서원자리였음을 알리는 표석이 있다.
1697년에 조윤벽(趙潤璧) 등의 청액소(請額疏)로 ‘노강(鷺江)’이라 사액되었다.
1754년에 중건되었다.
노는 해오라기 노(鷺) 강은 큰내 강(江)으로
그가 세상을 뜬 노량진의 지명에서 서원의 이름을 따온 것으로 보인다.
대원군의 서원 철폐 당시 훼철되지 않고 남은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며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왔다.

.
1925년 큰 홍수로 한강 물이 넘치는 바람에 노강서원이 물에 떠내려갔다.
그 뒤 6ㆍ25동란 때 소실된 것을 1968년 수락산 자락으로 옮겨 복원하였다.
1977년에 경기도 지방문화재로 지정받았다.
"전하께서는 마음대로 행하시나
하늘의 뜻을 거스르지 못할 줄을 왜 생각하지 못하십니까.
신은 이미 나라에 몸을 바쳤으니,
상소로 임금의 허물을 간하는 것은 신하의 마땅한 분수와 의리입니다."
강직하기로 이름난 박태보(朴泰輔)는  인현왕후를 궁궐에서 내보낼 때
그 옳지 않음을 상소하여 왕의 노여움을 산다.
그는 원래 타고난 성품이 대쪽같이 꼿꼿하였다.
그래서 결코 누구에든지 아첨하는 법이 없었다.
이런 성격을 미워하는 사람들의 시기와 참소가 끊이지 않았다.
왕의 신임은 두터웠다.
숙종에게는 늦도록 세자가 없었다.
임금의 마음이 초조하던 차에 소의 장씨(禧嬪張氏)가 왕자를 낳았다.
너무나 기다리던 왕자라서 숙종은 말없이 기뻐했다.
숙종은 곧 왕자를 책봉하고 장씨를 희빈(禧嬪)으로 올려 주려고 했다.
 "아직 왕후마마가 젊으시온데, 조금만 더 기다려 보시옵소서.
세자 책봉은 너무 이른 줄 아뢰옵니다."
"그러하옵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 보옵소서."
박태보가 반대하고 나섰다.
"허, 거 참! " 숙종은 이마를 찌프렸다.
임금으로서는 세자 책봉이 단 한 시간이라도 더 빨리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왕자를 낳은 장씨와 그 일가붙이들은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 설쳐 대기 시작했다.

임금의 총애를 한 몸에 받게 된 장씨 역시 하루가 다르게 방자해져 갔다.
장씨의 어머니는 가마를 타고 궁궐을 드나들고
미관말직에 있던 천한 직책의 친척들까지 모두 중요한 벼슬자리에 임명되었다.
뜻 있는 대신들은 모이면 걱정부터 하곤 했다.
“정말 위태로워서 못 보겠소이다. 꼭 무슨 일이 나고야 말 것 같아서 말이요.”
“중요한 직책은 모두 장씨 일가붙이니 나라 꼴이 어찌되려고 이 지경으로 되어 가는지......”
“목숨을 걸고 임금께 아뢰어 봅시다.”
“안되오 목숨이 열 개라도 살아남지 못하오. 조금만 더 두고 기회를 봅시다.”
숙종 임금은 여러 신하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이 장씨소생을 왕세자로 삼았다.
그때 반대한 많은 신하들은 모두 다 멀리 귀양을 보내졌다.
장희빈은 눈엣가시 같은 인현왕후
민비를 쫓아 내기 위해 임금에게 갖은 거짓말을 꾸며 댔다.
거짓말에 넘어간 숙종은 민비를 궁궐에서 쫓아내려고 신하들에게 의견을 물었다.
”왕비 민씨는 본래 투기심이 많아 국모의 자질을 갖추지 못하였소.
그런데 이번에 장희빈의 몸에서 세자가 탄생하자
더욱 모질고 악독하게 두 모자를 괴롭히고 있소.
 그런 성품으로는 하루도 국모 노릇을 할 수 없으니 당장 폐출시키시오! ”
인현왕후 민씨는 억울하게 궁궐에서 쫓겨났다.
”폐비 민씨에게 일체의 음식과 생활비를 지급하지 말도록 하라!”
임금의 추상같은 명령 때문에 민씨는 겨우 친정의 도움으로 끼니를 이어갔다.
왕비 폐출 사건이 옳지 않다는 상소가 나라 안 곳곳에서 올라 오기 시작했다.
80 여명의 신하들은 앞을 다투어 상소를 올렸다.
”감히 짐이 하는 일에 이렇듯 들고 일어서다니!
용서할 수 없다. 모두 잡아 들여라. 내가 친국 하겠다. “
마침내 박태보 차례가 되었다.
”내가 너를 유난히 신임했거늘 정녕 네가 이 상소문을 썼느냐?”
”그렇습니다.”
“왜 썼느냐?”
박태보는 고개를 꼿꼿이 들고 임금을 바라보며 말했다.
”임금과 신하의 관계는 어버이와 자식과의 관계와 같사옵니다.”
”물론 그렇다.” 숙종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비가 죄 없는 어미를 내치려 하는데,
어느 자식이 두 눈을 뜨고 가만히 구경만하고 있겠습니까?”
숙종은 버럭 화를 냈다.
”그토록 짐이 잘못 했다면 짐을 임금의 자리에서 쫓아 내면 될게 아니냐?”
”임금을 모함하고 죄인을 두둔하다니?”
박태보는 안타까운 눈빛으로 임금을 바라 보았습니다.
”요즈음 전하께서 후궁을 총애 하심이 너무 지나치시옵니다.
한두 사람의 말만 믿고 국모를 폐하려 하시니, 신하로서 어찌 마음이 아프지 않겠습니까?”
숙종은 소리를 버럭 질렀다.
”이 무엄한 놈! 발칙스럽구나. 저놈을 몹시 쳐라!”
형리들은 박태보에게 매를 내리치기 시작했다. 곧 살이 찢겨 피가 흘렀다.
그래도 박태보는 바른말을 쉬지 않았다.
”네 잘못을 알겠느냐?”
거듭 숙종이 다그쳤으나, 박태보는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정말 지독한 놈이구나? 어서 실토하지 못할까?”
”무엇을 실토하라 하십니까? 평범한 백성이라도 부부의 도리는 지극한 법인데
우리 국모가 어떤 분이시기에 상스러운 죄인으로 몰아 내치십니까?”
”저놈이 감히 나에게 충고를 하는구나.
저놈이 입을 열지 못하도록 불로 지질 형구와 무릎을 누를 형틀을 대령하렷다!”
갖은 형벌을 다 받으면서도 박태보는 할 말을 다 하였다.
”화형과 무릎을 누르는 압슬 형벌은 역적 죄인에게나 쓰는 형벌입니다.
전하, 신에게 무슨 역적 죄가 있길래 이다지 험하게 다스리십니까?”
”네 죄는 역적 죄 보다 더하다.
감히 임금을 능멸한 죄, 어찌 역적 죄로 다스리지 못할쏜가?”
박태보의 살 타는 연기와 냄새가 온 궁궐 안에 퍼져 갔다.
”누구랑 함께 상소문을 지었느냐?" "저 혼자 지었습니다.”
”이세화가 이미 같이 지었다고 실토했다.”
”아닙니다. 그는 저를 살리려고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숙종은 형리에게 분부했다.
“저놈을 다른 곳으로 데려가 계속 문초하라!”
그리고 사람을 시켜 박태보의 상황을 살피게 했다.
”실토 했느냐?”
”아닙니다. 입이 붙어 버린 듯 달싹 도 안 합니다.”
”죽지는 않았더냐?”
”아직 실낱 같은 숨은 붙어 있습니다.”
숙종은 한숨을 내쉬었다.
”박태보 그 놈이 본디 대쪽 같은 놈인 줄은 알았지만
이런 참혹한 형벌을 받으면서도
비명 한번 지르지 않으니 참으로 지독 하구나.”
”계속 고문 할까요?” 대신의 물음에 숙종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고문한다고 소신을 굽힐 놈이 아니다.”
”그럼 하옥 시켜 둘까요?”
”멀리 진도로 귀양을 보내라. 당장!”
진도로 귀양가는 길에 들린 노량진 친구집에서 옥독(獄毒)을
견디지 못하고 사랑하는 여인의 품 속에서 세상을 떠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