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어, 금원과 란사의 사랑이야기

전설 2015. 11. 15. 22:43 Posted by 조영희

행주나루 터 앞 돌빵구지라는 마을에 ‘금원’이라는 소년이 살았다.
 ‘금원’은 부모님을 여의어 혼자 힘으로 한강에서 고기를 잡아 생계를 이어갔고,
어릴 적 몸을다쳐 등이 굽었지만 한강을 벗 삼아 살아가는 심신이 강인한 소년이었다.
행주나루 부근 한강에는 팔도에서 희귀하기로 유명한 웅어가 잡혔다.
 어찌나 희귀하였는지 임금님만 드실 수 있도록 국법으로 정해져 있을 정도였다.
이 법을 어기는 자는 돌빵구지 동굴에 있는 석빙고에 갇혀 죽는 끔찍한 형벌을 받도록 되어 있었다.
따뜻한 봄날, 한양에 사는 정 판서라는 사람의 셋째 딸 ‘란사’가 행주나루로 오게되었다.
‘란사’는 창백한 얼굴에 몸이 가녀린 소녀였다.
 날 때부터 몸이 약했던‘란사’는 늘 잔병치레를 하였는데 한양의 어느 의원이 이르는 대로
행주나루로 요양을 오게 된 것이다.
 나무를 하러 산에 오르던 금원은 진달래꽃을 안은 채 산에서 내려오고 있는 ‘란사’와
 마주치게 되는데 마치 살아있는 선녀의 모습으로 보였다.
그날 이후 ‘금원’은 ‘란사’를 한시도 잊을 수가 없었다.
‘란사’의 병세는 악화돼 외출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쇠약해졌다.
소식을 들은 ‘금원’도 식음을 전폐하고 앓기 시작했다.
‘란사’에 대한 그리움과 걱정으로 병든 것이다.
하루는 금원을 가엾이 여긴 주지스님이 그를 찾아와 이렇게 말했다.
“란사의 병을 낫게 하려거든한강에 사는 웅어를 먹게 해주어라.”
‘란사’를 살릴 수 있다는 생각에 다시 기운을차린 ‘금원’은 한강으로 가 웅어를 잡기 시작했다.
오직 ‘란사’의 건강이 회복되기만을 기원했다.
한강의 중심을 향해 노를 젓던 중 갑자기 파도가 치더니 웅어 한마리가 ‘금원’의 앞으로 툭 떨어졌다.
 기쁜 마음으로 웅어를 정 판서에게 전달한 ‘금원’은 다음 날 스스로 석빙고로 들어가 얼어 죽는다.
 ‘란사’는 웅어를 먹고 기적처럼 몸이 회복되어 ‘금원’을 찾아가 감사의 말을 전하려 했다.
돌빵구지 마을로찾아갔지만 ‘금원’은 없었다.
그러다 웅어를 잡은 죄로 석빙고에 갇혀 죽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듣게 되고 충격에 빠진다.
 얼마나 흘렀는지 돌빵구지 마을에서는 더 이상 ‘란사’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석빙고 속에 또 하나의 얼음사람이 생겼다는 소문만 무성하게 돌고 있었다.
또 누군가는 해질 무렵 두 마리의 웅어가 힘차게 한강에서 노닐다 무지개 속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보았다고도 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친 용감한 소년 ‘금원’과
그의 깊은 사랑에 보답하고자 같은 길을 따른 ‘란사’의 사랑이야기는
오래도록 돌빵구지 마을 사람들에게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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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한강사』에서 옮긴 글이다.

마포의 담담정

정자 2015. 9. 6. 07:21 Posted by 조영희

 

 담담정은 조선 초에 안평대군이 지은 정자이다.
안평대군은 이 정자에 만여 권의 책을 쌓아두고 시회(詩會)를 베풀곤 했으며
이 정자에 거둥하여 중국의 배를 구경하고 각종의 화포를 쏘는 것을 구경하였다.
이후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하고, 야인정벌에 공을 세운 영의정 신숙주의 별장이 되었다.
 이 정자 터에는 마포장이 지어져 광복 후 이승만 대통령이 잠시 머물기도 하였다.

현재 벼랑고개 위 벽산빌라 앞에는 담담정이 있던 곳이라는 표지석이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담담정은 조선 초에 안평대군이 지은 정자다.
안평대군은 이 정자에 만여 권의 책을 쌓아두고 시회(詩會)를 베풀곤 했으며
이 정자에 거둥하여 중국의 배를 구경하고 각종의 화포를 쏘는 것을 구경하였다.
이후 세종 때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하고, 야인정벌에 공을 세웠으며
네 번이나 영의정을 지낸 신숙주의 별장이 되었다.
이 정자 터에는 마포장이 지어져 광복 후 이승만 대통령이 잠시 머물기도 하였다.”

아래의 사진과 글은 '김달진미술연구소' 홈페이지의 글 '사라진 전설, 담담정 : 김석신, 담담장락'에서
그대로 옮겨온 것이다.

김정호(金正浩1804-1866)가 1861년에 제작한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를 보면 만초천(蔓草川넝쿨내)이라는 냇물이 뚜렷하다. 넝쿨내는 지금 원효대교(元曉大橋)에서 용산전자상가를 거쳐 용산역 쯤에서 한 줄기는 이태원, 목멱산(木覓山*남산)까지,
또 한 줄기는 청파로(靑坡路), 서울역, 독립문, 모악산(母岳山)까지 거슬러 오른다.
지금은 온통 시멘트로 뒤덮여 냇물이 있었는지조차 모르지만 1967년 복개공사 이전까지는 엄연한 냇가였다. 이곳에 넘쳐드는 물을 막으려 강바닥 파내는 준천(濬川)을 되풀이하던 중 1914년부터 아예 제방(堤防)을, 1967년엔 복개(覆蓋)를 하고 말았다.
이곳 서호(西湖)는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 일찍이 백제(百濟) 기루왕(己婁王재위77-111) 때 두마리 용이 나타났으므로 용산호(龍山湖)라 불렀는데 이중환(李重煥1680-1752)이 <<택리지(擇里志)>>에 쓴 것처럼 조선개국 직후 서쪽 염창(鹽倉) 모래언덕이 무너져 한강 조수(潮水)가 통하기 시작함에 팔도의 화물을 수송하는 배가 모두 용산에 정박(碇泊)하기 시작했다.
그림에 줄지어 선 선박(船舶)이 이웃 마포(麻浦)와 더불어 조선 최대의 포구(浦口) 유통기지임을 드러내고
 넝쿨내 건너 남산 아래 줄지어 선 기와집 또한 상가(商街)며 창고(倉庫)가 즐비하여 번화한 상업지대임을 알려주고 있다.저 넝쿨내가 한강 서호 또는 용산호에 섞일 즈음 바위가 치솟아 절경을 이루었으니 고려(高麗)의 왕들이 즐겨 찾던 곳이었다.
 조선(朝鮮)개국 초였을까, 위태로운 끝자리에 누각 하나 세워 읍청루(揖淸樓)요, 그윽한 안쪽에 정자 하나 세워 담담정(澹澹亭)이라 아름다움 만만치 않았다.
유본예(柳本藝1778-1842)가 <<한경지략(漢京識略)>>에 이르기를, 안평대군 이용(安平大君李瑢1418-1453)이 “담담정을 짓고 만 권의 서적을 쌓아두고 문사(文士) 들을 모아 혹 밤새도록 등불을 밝히고 담화를 하며, 혹은 배를 타고 달밤에 놀이를 했다”고 하였다.
계유정난(癸酉靖難)으로 안평대군이 살해당하자 신숙주(申叔舟1417-1475)가 이곳을 차지하였다.
서용보(徐龍輔1757-1824)와 이재학(李在學1745-1806) 일행이 어쩌면 압구정(狎鷗亭)을 거쳐 내친 김에 담담정까지 내려왔을지 모르겠다.
김석신(金碩臣1758-1816이후)도 함께 하였을 터 당연히 그 풍경 그렸을 게다.
압구정에도 일곱 사람인데 담담정에도 일곱이니 그러려니 하지만 서용보 일행이 아니면 또 어떤가.
오히려 절벽 아래 포구 옆 빨래하는 여염(閭閻) 아낙네가 정겹고 그 방망이 소리 울려 퍼져 건너편 동쪽 버드나무 더욱 흐드러진다. 뿐만 아니라 그림 속 넝쿨내는 ‘새벽 빛나는 냇물’이라 욱천(旭川)이란 이름도 갖고 있었거니와 주민들이 밤마다 불 밝히고 게 잡는 풍광이 장관을 이루었다.
<화폭 오른쪽부터 아래쪽까지 훤한 모래 들판[白沙場]인데 지금 서울역부터 용산역을 거쳐 한강철교까지 풍경이다. 탁트인 시야가 그 맑고 그윽한 즐거움 베푸는데 더없이 어울렸음에랴,
북벌(北伐)의 꿈을 키우던 효종(孝宗1619-1659*재위1649-1659)은 1655년 9월 29일 일만군병(軍兵)을 강 건너 노량진(露梁津)에 집결시켜 삼엄한 열무식(閱武式)으로 군기(軍紀)를 치켜세우기도 하였건만
1876년 개항 이래 이태원부터 용산까지 일본인이 몰려들어 조선침략의 전진기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곳 용산 백사장에서 강 건너 노량진까지 배다리[舟橋]를 놓곤 했었는데
정조(正祖1752-1800 *재위 1776-1800)는 빈번한 화성(華城*水原) 길 번거로움 줄이고자 청파동 징검다리에 주교사(舟橋司)란 관청을 설치하였다. 그 징검다리를 청파동 배다리라고 불렀거니와 1926년 무렵 없어진 이 징검다리는 숱한 화제를 낳았다.
광해(光海1575-1641 * 재위1608-1623) 시절 징검다리에서 밤마다 상서로운 빛이 솟아났다.
파내보니 현판이 나왔는데 임진왜란 때 잃어버린 숭례문(崇禮門*南大門) 현판이었다. 양녕대군 이제가 쓴 현판 글씨를 되찾았으니 왕위를 아우에게 물려주고 자유인으로 살아갔던 양녕대군을 사랑해마지 않던 숱한 민인(民人)들에겐 너무도 즐거운 이야기라 더욱이 글씨의 주인이 누구인지 밝혀둔 <<추강냉화(秋江冷話)>>의 지은이가 생육신(生六臣) 남효온(南孝溫1454-1492)이니 그 이야 끝도 가도 없이 퍼져나가 전설로 바뀌었던 게다. 문장사대가(文章四大家)로 이름 높던 이정귀(李廷龜1564-1635)가 사라져버린 담담정 터에서 옛노래 불렀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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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방어선전략

한강이야기 2014. 2. 5. 19:55 Posted by 조영희

1950년 6월 25일 북한이 남침을 감행했다.
국군은 계속 북한군에 밀려 개성 철원 의정부 방어선이 차례로 무너졌다.
19050년 6월 28일 새벽 미아리 방어선도 무너졌다.
국군은 극도의 혼란 속에서 철수를 시작한다.
28일과 29일 사이 한강 남안에서 철수병력의 집결을 완료할 수 있었다.
서울을 상실한 국군에게 한강은 방어에 가장 양호한 지형이었다.
이제 한강선은 국군이 적을 어떻게 방어하느냐에 따라
이 국가의 존망이 결정될 만큼 중요하게 되었다.
채병덕 총참모장은 한강을 연한 방어선에서 적의 진격을 저지하기로 결심한다.
육군참모학교장 김홍일 소장을 시흥지구전투사령관으로 임명하고 한강선 방어임무를 맡겼다.
서울이 함락되자 채병덕 육군총참모장은 6월 28일 낮 12시.
육군본부를 수원으로 이전하고 한강방어를 위한 조치를 취한다.
채 총참모장은 육군참모학교교장인 김홍일 장군을 총장실로 불러 한강방어를 요청한 것이다.
“선배님! 아군이 기사회생할 수 있는 길은 한강을 방어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김홍일 장군은 채 총참모장의 제안을 기꺼이 수락했다.
“총장님! 그동안 고생하셨습니다. 소관이 신명을 바쳐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8.15광복 당시 채병덕 총장은 일본군 소령 계급이었다.
김홍일 장군은 중국의 장개석의 신임을 받았던 중국군 소장 출신이었다.
채 총장은 김홍일 장군이 나이로도 약 20년 차이가 났기 때문에
군의 대 선배로 깍듯이 대접한 것이다.
김홍일 장군은 채 총장의 진정성이 넘치는 부탁에
승산이 없는 싸움인 줄 뻔히 알면서도 국가를 위해 그 제의를 기꺼이 받아들인다
1950년 6월 28일부터 7월 3일까지 최악의 상황과 조건이었다.
그럼에도 김홍일장군은 한강선 방어를 책임지는 시흥지구전투사령관에 임명되어
한강선 방어의 책임을 수행하게 된다.
개전 3일 후인 6월 29일 도쿄에서 극동군 사령관인 맥아더 원수가
그 상공에서 공중전이 벌어지고 있는 수원비행장에 착륙했다.
맥아더 원수는 수원비행장에까지 친히 영접을 나왔던 이승만 대통령을 만나
요담을 나눈 후 시흥지구 전투사령부 김종갑 참모장의 안내를 받아
곧장 70세 노구로 지프차를 몰아 한강방어선을 시찰하였다.
그의 방문목적은 한국전황을 직접 살펴보고 지상군 파병의 필요성을 검토하기 위함이었다.
북한군의 막강한 일방적 포격을 받고 있는 영등포의 제8연대본부에 와서
적진을 쌍안경으로 직접 관찰하기도 하였다.
개인호에서 진지를 지키고 있던 병사를 발견하고 가까이 다가가 직접 대화를 나누었다.
그 병사는 맥아더 원수의 질문에 망설임 없이 대답한다.
"직책이 무엇인가?"
"분대장입니다."
"언제가지 여기를 지킬 것인가?"
"소대장의 명령이 있을 때까지 지킬 것입니다."
"명령이 생명보다도 중요한가?"
"네. 그렇습니다."
"끝까지 명령이 없을 때는 어찌할 것인가?"
"죽을 때까지 싸우겠습니다."
"죽는 것이 두렵지 않은가?"
"두렵지 않습니다."
"음.. 알았다. 무엇인가 필요한 것은 없는가?"
"네. 우리는 지금 (M1)소총밖에 없습니다.
적의 전차와 대포를 때려잡을 수 있는 무기가 필요합니다."
"그밖에는?"
"없습니다."
"음... 내가 여기 온 보람이 있었다.
내가 돌아가서 바로 미군 자상병과 병기를 보내주겠다.
용기를 잃지 마라."
맥아더 장군은 그 병사와의 약속을 결코 저버리지 않았다.
맥아더 장군은 한강선 시찰을 마치고 김홍일 장군에게 묻는다.
“김 장군! 지금 한강방어선은 언제까지 방어할 수 있습니까?”
김홍일 장군은 자신 있게 결연한 의지로 답변했다.
“공격과 방어의 배수 원칙을 감안할 때
앞으로 열흘 정도는 지탱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현재 한강선 도처에서 한국군이 적의 보병이 도하해 오는 것을 단호하게 격퇴시키고 있습니다.
보병끼리의 전투에서 한국군이 적에 비해 단연 우세합니다.”
맥아더 장군은 김홍일 장군의 정연한 답변에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하는 듯 했다고 한다.
맥아더장군은 한강선 시찰결과 전문을 30일 새벽 3시 미 국방부에 보낸다.
“한국전선을 시찰한 결과 한국군은 붕괴되었으며
한강방어선을 고수하고 실지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미 지상군 투입이 불가피하다.”
백악군은 그날 오전 11시 공식성명을 발표한다.
“북한 침략자를 격퇴시키고 한국의 평화를 회복시키는 데
대한민국을 지지해 달라는 유엔안전보장이사회의 요청에 응하여
트르먼 대통령은 미 공군에게 군사적으로 필요하다면
북한의 어떤 군사목표에 대해서도 공격을 수행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고
한반도의 전 연안의 해상봉쇄를 명령했다.
맥아더 장군에게는 확실한 지상부대를 사용할 권한을 부여했다.”
그리고 다음날 맥아더 원수는 긴급전보로 트루먼 대통령에게
재일(在日) 제8군의 2개 사단 병력 출동을 요청하여 승낙을 받았다.
맥아더 원수가 아니고서는 미국의 본격적 참전이
이렇게 급진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1950년 6월 28일 오전 2시 30분 한강 인도교와 철교가 폭파됨으로써
한강 이북의 수도 서울은 완전히 북괴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아군은 한강이라는 자연적인 장애물을 이용하여
저지선을 구축하고 북괴군의 도하를 막게 되었다.
김홍일 사령관은 유재흥 준장을 제7사단장에 임명하여 노량진 방면에 배치했다.
이종찬대령을 수도사단장으로 임명과 동시에 영등포 방면에 포진케 하였다.
한강 저지선의 서쪽에서는 김포지구 전투사령부가 김포 비행장과 오류동 일대에서
북괴군의 진출을 억제하며 측면 지원을 하고 있었다.
서울을 점령한 북괴군은 제3사단 제4사단 제105 전차여단에게
 ‘서울사단’이라는 칭호를 부여하는 등 기세가 등등했다.
미군을 포함한 국제연합군이 내원하기 전에 국군의 주력 부대를 섬멸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6월 29일 밤부터 북괴군은 한강 도하작전을 시작하였다.
북괴 제3사단은 30일 새벽에 서빙고에서 도하하여
동작동과 흑석동을 잇는 고지로 진출을 시도하였다.
그들의 계획은 노량진 부근의 고지대를 장악하여
그 엄호 아래 폭파에 실패한 한강철교를 이용하여 전차를 도하시키려는 것이었다.
여기에서는 북괴군이 전차의 지원을 받지 못한다는 사실에
고무된 우리 국군은 대등한 조건 속에서 북괴군 제3사단을 공격하여
커다란 타격을 가하면서 7월 3일까지 그들이 한강을 건너지 못하도록 저지하였다.
영등포 방면에서는 국군 제8연대와 제18연대의 일부 병력이
6월 27일부터 7월 3일까지 수차례에 걸쳐 북괴군의 공격을 격퇴하면서 여의도를 확보하고 있었다.
북괴군은 불완전하게 파괴된 한강의 복선철교를 수리한다.
마침내 7월 3일을 기하여 전차를 도하시키고 이를 앞세워 영등포 방면으로 진출하기 시작한다.
국군의 한강 저지선은 붕괴되고 서울은 완전히 공산군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었다.
김홍일장군의 시흥지구전투사령부는 한강방어선을 6일동안이나 지켜냄으로써
국군이 전열을 정비할 수 있었다.
미국이 한국전에 참전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얻어내는 기대이상의 큰 성과를 거둔다.


서울 흑석동은 한강가에 있는 마을이다.
면적 1.68㎢, 인구 4만 2268명 서울특별시 동작구에 속한 동이다.
한강대교와 동작대교 사이의 남쪽에 있다.
동·서·남쪽의 3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북쪽은 한강에 닿아 있다.
동쪽은 동작동, 서쪽은 본동, 남쪽은 상도동과 접해 있는 흑석동이다.
흑석1동사무소 남쪽 일대에서 나오는 돌이 검은색을 띠므로
검은돌(黑石)마을이라 한 데에서 유래한 흑석동이다.
지금의 흑석1동 232, 243번지(12·14·16·17통) 일대를 지칭했다.
은로초등학교 자리에는 동사무소가 있었다.
또한 남부동에는 우리 전통 한옥 120여채가 지금도 밀집되어 있어
 일명 한옥촌이라고도 부른다.
지금의 흑석동 232번지와 243번지 일대에 검은색 돌이 나온다고 하여
지명을 '검은돌' 이라고 했다.이것을 한자로 바꿔 흑석(黑石)이라고 칭했다.
흑석동은 조선시대 말까지 경기도 과천군 하북면 흑석리였다.
1914년 3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111호와 동년 4월 1일
경기도령 제3호에 의한 경기도 구역획정 때 시흥군 북면 흑석리로 칭하였다.
그 후 1936년 4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8호로 경성부에 편입되어 흑석정이 되었다.
1943년 6월 10일 조선총독부령 제163호로 구제도(區制度)를 실시하면서 영등포구 흑석정이 되었다.
광복 후 1946년 10월 1일 일제식 동명을 우리 동명으로 바꿀 때 흑석동이 되었다.
그후 1973년 7월 1일 대통령령 제6548호로 영등포구에서 관악구를
분리 신설할 때 관악구에 이속되었다.
1980년 4월 1일 대통령령 제9630호로 관악구에서 동작구를 분구하면서
흑석동은 동작구에 속하여 오늘에 이른다.
검은돌시장
흑석2동 9, 43번지 일대에 있던 시장이다.
이 시장은 주로 야채류, 과일류 등 각종 농산물이 거래되었다.
 광복 직후 길거리에서 안쪽으로 밀려 지금의 흑석3동에 있는 흑석시장 자리에 정착하게 된 것이다.
검은돌시장은 당시 서초동·양지동, 과천지방 사람들이 많이 이용하였다고 한다.
범바위
흑석2동 시민아파트가 있었던 아래쪽 한강변에 있었던 바위이다.
옛날 이곳에는 많은 낚시꾼들이 모여들어 고기잡이를 하였다 한다.
어느날 한 낚시꾼이 커다란 잉어 한 마리를 낚자
갑자기 눈보라와 모래가 휘날려 눈 앞이 보이지 않았다.
이상히 여긴 나머지 뒤를 돌아다보니 커다란 호랑이가 나타나
어슬렁거리며 앞발을 내미는 것이었다.
낚시꾼이 질겁을 하고 도망을 치자 호랑이도 그 뒤를 쫓아왔다.
낚시꾼이 더 이상 도망을 가지 못하고 마침 그곳에 구멍이 뚫린 큰 바위 속으로 들어갔더니
호랑이가 들어오지 못하고 밖에서 두리번거리고만 있었다.
그러자 그는 그 바위 속에 갇혀서 나오지도 못하고 결국 죽었다.한다.
이 호랑이가 앞발짓을 한 것은 잉어를 달라는 뜻이었다.
 낚시꾼은 자기를 잡아 먹으려고 하는 줄 알고 결국 죽음을 당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 오고 있다.
공동묘지
흑석시장 입구에서 중대부고로 가는 길 양쪽과 골짜기에 공동묘지가 있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에는 옛날 본동·노량진동·상도동,
그리고 흑석동 주민들이 세상을 떠나면 이곳에 묘를 썼다 한다.
그러나 이 지역이 서울시로 편입되면서 묘지 사용이 금지되었다.
 서울시가 기존 묘도 이장하도록 공고한 후
이 지역을 개인에게 불하하여 지금의 주택들이 들어서게 되었다.
서달산
흑석동 남서쪽 달마사(흑석1동 37번지)가 있는 뒷산으로 돌이 많이 나왔다고 한다.
 달마산
달마사라는 절이 있는 산 이름이다.
집박굴우물
달마사 밑에서 나던 맑은 물로 약수는 아니지만 물맛이 썩 좋았다고 한다.
대동우물
흑석1동 156번지 지금의 성모병원 자리에 있던 우물이다.
 옛부터 동리주민 약 80여호가 사용하였던 큰 우물이었으나
병원이 들어서면서 메꾸어졌다.
대머리산
흑석2동 26번지 일대로 지금의 벧엘교회 옆 동산을 말한다.
이 산의 꼭대기 부분에 나무가 하나도 없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도당째
학도의용군 현충비가 세워진 위에는 큰 바위가 있었다.
바위 사이에 아름드리 소나무가 한 그루 서 있었다.
전에 마을 주민들은 이곳에 칠성님을 모시는 도당을 만들어
일년에 봄, 가을 두 번씩 마을에 풍년이 들기를 기원하고,
질병이 없기를 비는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일명 도당칠성이라고도 하였다.

명수대
서달산 꼭대기에 있었던 건축물이다.
1920년 일본인 부호 목하영(木下榮)이란 사람이
이곳에 별장을 짓고 놀이터를 만들었다고 한다.
맑은 한강물이 유유히 흐르는 경치 좋은 곳이라 하여
명수대란 이름을 붙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광복 후 이 건물을 철거되었다.

명창굴
흑석1동에서 상도동으로 넘어가는 중앙대학교 중문 부근의
마을 이름으로 지금도 오래된 한옥이 있다.
옛날 이 마을 앞으로 조그마한 개천이 흘렀다고 한다.
 
비개마을
흑석2동 26·28·33·38번지 일대로 한강변 기슭에 비스듬히 비껴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현재 버스정류장 이름으로도 유명하다.

찬우물
비개마을 부근 산버덩에 있었던 우물로 물이 매우 차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솔밭
흑석 3동 7, 8통 일대 지역에 있었던 마을로
옛날 이곳에 소나무가 많이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안말·새말
안말은 흑석1동 5통(125-133번지)일대의 마을을 일컫는다.
새마을의 유래는 을축년 큰 장마 때 안말이 침수되자
그곳 주민들이 좀 더 높은 지대이던 지금의 중앙대학교 앞으로
 옮겨서 새로 집을 짓고 살게 되면서 생긴 것이다.
그리고 흑석1동 156번지 성모병원이 들어선 지역의 마을을 웃말이라고 칭했다.

약수동
흑석3동 69번지 6통 일대의 마을로 옛날 이곳에서
아주 맛있는 약수물이 나왔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연못께
연못시장(흑석동 101·102·182번지)과 주택은행이 있는 일대에 연못이 있었다고 한다.
이 연못은 일제 때 일본인 목하영(木下榮)이 이 곳에 5천평 정도의 커다란 연못을 파고
가운데 나무를 심어 섬을 만들어 놓은 까닭에 동리 사람들의 휴식처와 낚시터로도 이용되었다고 한다.
광복후에 이곳을 메꾸고 시장이 생기자 연못자리에 있는 시장이라 하여 연못시장이라고 불리어지게 되었다.

완성군산
완성군산(일명 왕성군산)은 전주이씨 덕천군파 완성군의 묘소가 있는 산으로,
흑석2동 54-323호에 양옥으로 된 재실(齋室)이 있으며
후손이 이재주(李在周)가 20년 전부터 이곳을 관리하고 있다.
이 산을 왕성군산으로 칭하는 것은 완성군의 묘소가 있기 때문인데, 이를 잘못 발음하여 불려진 것이다.

재강굴산
붉은 산이란 데서 붙여진 이름으로 중앙대학교 뒷산을 일컫는데,
중앙대학교를 설립한 임영신의 묘가 있다.


 

공암진의 '투금(投金)' 형제 사랑이야기

전설 2013. 8. 25. 18:42 Posted by 조영희

 

경강은 광나루에서 시작하는 서울의 한강이다.
한강의 나루 가운데 마지막 나루 공암나루다.
그 나루터가 지금은 한강 강변고속도로 건설로 땅위에 올라서 있다.
고려 공민왕 때 이억년 이조년 형제가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남쪽 지방에서
일을 보고 개성의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공암진에 도착하였다.
앞서 가던 동생 조년이 갑자기 허리를 구부리더니
땅 속에서 큰 황금 덩어리 두 개를 집어 들었다.
"형님, 우리가 길을 가다가 우연잖게 이러한 황금을 얻었으니
하나는 제가 갖고 하나는 형님이 갖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동생 조년의 기특한 제안을 형 억년이 받아들였다.
이들 형제는 황금 두 덩어리를 서로 우애 좋게 나누어 갖었다.
이들 형제는 공암진에서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배가 강 가운데 이르렀을 때다.
동생 조년이 짐보따리에서 큰 황금덩어리를 꺼내 강에 던졌다.
갑자기 벌어진 일이었다. 형 억년이 동생 조년에게 물었다.
"아우야! 아까 우리가 나누어 가진 황금덩어리를 버린 것 아니냐?"
"예, 형님 맞습니다. 그 황금덩어리입니다."
"아니! 왜 그 황금덩어리를 강에 버렸느냐?"
"죄송합니다.형님! 평소 형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무척이나 깊었습니다.
그 금덩어리를 나누고부터 형님을 꺼리는 마음이 생기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형이 없었으면 두 덩어리가 내 것일 텐데하는 욕심과 함께 말입니다.
그게 두려워 황금을 그냥 물에 던진 것입니다."
"그래 네 말이 옳다. 나도 그랬지."
형 억년이도 황금덩어리를 강에 던저버렸다.
이 소문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황금을 던져 버린 여울이라고 해서
공암나루를 투금탄(投金灘)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황금을 던져 버린 물가라고 해서 김포(金浦)라는 지명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이화에 월백하고 은한이 삼경인제/
일지춘심을 자규야 알랴만은/
다정도 병인양 하여 잠 못들어 하노라/"
시조 다정가(多情歌)다. 만인이 좋아하는 시조다.
'형제투금'의 사건의 주인공 동생 이조년은 이 시조를 지었다.
그는 고려 후기 충렬왕·충선왕·충숙왕·충혜왕 4대에 걸쳐 왕을 보필한 문신이다.
요즈음 글로 다정가를 바꾸어 보았다.
"하얀 배꽃 밝은 달빛, 은하수는 한밤인데
아직 남은 푸른 내 맘, 소쩍새가 어찌 알까
정 많음이 병이라서, 잠 못 들고 뒤척이네."
그의 형제들의 이름이 좀 특이하나 우애는 남달랐다.
맏형 이백년(李百年) 둘째 이천년(李千年) 셋째 이만년(李萬年),
넷째 이억년(李億年) 다섯째 이조년(李兆年) 이다.


 

 

 

 

한강의 발원지 검룡소를 찾아서

한강이야기 2013. 8. 21. 20:17 Posted by 조영희

 

강원도 태백은 백두대간의 분수령을 끼고 있다. 가히 강의 고향이라고 할만한  태백이다.
백두대간 금대봉(1,418m) 기슭의 검룡소(儉龍沼)는 한반도의 젖줄인 한강의 발원지이다.
태백시내 한복판에 자리한 황지(黃池)는 영남 땅을 적시며 흐르는 낙동강의 발원 연못으로 유명하다.
이웃 삼수령 정상 휴식터에 있는 삼수정 앞 상징탑에서 삼수령의 글을 아래에 옮긴다.
"하늘이 열리고 우주가 재편된 아득한 옛날
옥황상제의 명(命)으로 빗물 한가족이 대지(大地)로 내려와
아름답고 행복하게 살겠노라고 굳게 약속을 하고
하늘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이 빗물 한가족은 한반도의 등마루인 이곳 삼수령(三水嶺)으로 내려오면서
아빠는 낙동강으로
엄마는 한강으로
아들은 오십천강으로 헤어지는 운명이 되었다.
한반도 그 어느 곳에 내려도 행복했으리라
이곳에서 헤어져 바다에 가서나 만날 수밖에 없는
빗물 가족의 기구한 운명을
이곳 삼수령만이 전해주고 있다."
 

검룡소에는 두 개의 탐방안내소가 있다.
생태환경을 설명하는 봉사자와 문화해설을 하는 문화관광해설가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그곳에서 탐방객의 인적사항을 기록하고 신비한  1.3km의 숲 길로 들어선다.
그 입구부터가 천연의 자원이 신비스럽게 전개된다.
정부는 검룡소 일대를 명승지로 지정하여 환경을 보호하고 있다.


 
나무로 만든 다리 세심교(洗心橋)가 세상을 둘로 가른다.
다리를 건느면서 지금까지 안고 있던 근심 걱정을 다 내려놓으라고 한다.
맑은 시내물에 말끔히 씻고 다리를 건너 정(淨)한 마음으로 검룡의 세상을 만나라라고 한다.
 

검룡소 들어가는 신비의 길이다.
길 양쪽에 이깔나무 빼곡한 운치가 넘치는 산길이다.
검룡소에서 흐르는 물의 방향으로 왼쪽으로는 참나무 숲을 이루고
오른쪽으로 30~40년 전후로 식재한 것으로 보이는 낙엽송(이깔나무)으로 숲을 이룬다.
숲 속에는 식용 또 약용으로 이용하는 얼러지가 홍자색으로 앙증맞게 꽃을 피우며
어떤 새인지 보이지는 않지만 산새의 울음소리가 들려 인적 드문 계곡의 정적을 깨기도 한다.

검룡소의 안내판이다. 검룡소는 한강의 발원지로 창죽동 금대봉골에 위치해 있다.
전설에 의하면 서해에 살던 이무기가 용이 되기 위해 한강 상류를 향해 거슬러 오르다가
검룡소에 이르러 자리를 잡고 살았다. 소들이 풀을 뜯어 먹으로 오면 잡아먹었다.                               
동네 주민들은 이 검룡소를 메워버렸다.이무기는 결국 용이 되지 못했다고 한다.
검룡소는 1980년대에 복구되었다.
처음에는 금태봉 자락에 있다고 해서 금용소(金龍沼)라고 했다.
점차 마을주민 사이에서 억양상 ‘금’의 발음이 ‘검’으로 읽혀갔다.
그래서 아예 금(金)자 대신 ‘검(儉)’자로 변경키로 했다.
민족의 시조인 단군 왕검(王儉)의 ‘검(儉)’을 인용해 검용소(儉龍沼)로 변경한 것이다.
지명의 변경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어법상 ‘용’(龍)을 ‘룡’으로 표기해야 한다는 지적에 따라 비로소
현재의 상용단어인 검룡소(儉龍沼)를 완성하게 됐다.
한강의 발원지는 평창 오대산 우통수로 알려졌다.
세종실록 지리지에서 우통수 기사를 옮겨서 살핀다.
"명산(名山)은 오대(五臺)이다.부(府) 서쪽에 있다.
봉우리 5가 고리처럼 벌려 섰는데, 크기와 작기가 고른 까닭에 오대산이라 한다.
서대(西臺) 아래 수정암(水精庵) 옆에서 우리샘[檻泉]이 솟아나는데,
〈물의〉 빛과 맛이 여느 물과 다르고,
그 무게도 또한 그러하므로 우통수(于筒水)라고 하며,
곧 금강연(金剛淵)은 한강물[漢水]의 근원이 된다.
봄·가을에 그 고을 관원으로 하여금 제사지내게 한다.
한강물이 비록 여러 곳의 물을 받아 흐르나,
우통수가 중심이 되어 빛과 맛이 변하지 아니해서
중국의 양자강(揚子江)과 같으므로, 한(漢)이란 이름이 이로 인하여 되었다.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 바다 어귀에 이르기 8리, 남쪽으로 삼척에 이르기 70리,
서쪽으로 횡성(橫城)에 이르기 1백 55리, 북쪽으로 양양(襄陽)에 이르기 46리이다."


태백의 광명정기 예솟아(여기서 솟아) 민족의 젓줄 한강을 발원하다.
이 비문처럼 한강의 발원지임으로 밝혀내는데는 태백 향토인들의 노력이 컸다고 한다.
김강산 전 태백문화원장이 1984년 어느날 창죽천 금대봉 기슭에서 석회암반을 뚫고
끈임없이 분출하는 물줄기를 목격한다.
김 소장은 그 날 우연히 5만분의 1 지도를 통해 당시까지 한강의 발원지로 알려진
오대산 우통수와 창죽천의 물이 합수되는 정선군 나전리를 기준으로 강물길이를 도상실측했다.
뜻밖에도 우통수가 약 53㎞, 창죽천이 약 85㎞에 달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창죽천이 우통수 보다 32㎞나 긴 하천으로,
금대봉 기슭에서 흘러나온 물줄기가 한강발원지라는 계산이었다.
안창죽 금대봉 기슭에서는 작은 샘물이 다섯 곳이상 발견됐지만 모두 창죽천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땅 속으로 스며들어 그 흔적을 알 수 없었다.
이는 태백지역 지질 특성상 석회 암반의 지하공동으로 유입되어 물구덩이로 솟아나기 때문이다.
물줄기가 가뭄시기에도 변함없이 솟아나는 최상류 지점이 바로 오늘날의 ‘검룡소’로 지정된 것이다.

 

태백시 창죽동 금대봉 기슭 검룡소와 그 일대 계곡은 특이하고
아름다운 지형 지질학적 경관을 이루고 희귀한 동식물상이 있다.
검룡소와 관련된 전설이 담겨 있는 역사 문화 경승지이다.
검룡소는 석회암반을 뚫고 하루 2천 톤 가량의 지하수가 솟아나오는 냉천(冷泉)으로
사계절 9℃ 정도의 수온을 유지하고, 20m 이상 계단상 폭포를 이루고 있다.
오랜 세월 흐른 물줄기로 인해 깊이 1~1.5m, 폭 1~2m의 암반이 푹 파여서
그곳으로 물이 흐르는데 용트림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검룡소는 둘레 20여m에 깊이를 알수 없다. 
석회암반을 뚫고 지하수가 하루 2-3천톤가량 솟아난다.
이 곳 물의 온도는 늘 9도를 유지하고 있다.
물이 솟아나는 구멍에 큰 돌이 놓여 있다.
큰 태풍 때 돌이 굴러와 용출구를 막고 앉았다고 전한다.
물 속에는 동전이 곳곳에 보인다.
환경보전을 위해 동전을 던지지 말 것을 호소하고 있다.
일부 탐방객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동전을 던진다.
검룡소에서 '복'이 쏟아질 것을 갈구하면서 말이다.


 





 

 

호머 헐버트의 문경새재아리랑

한강이야기 2013. 8. 16. 10:20 Posted by 조영희

 

"문경새재 물박달나무/ 홍두깨 방망이로 다 나간다/ …/
홍두깨 방망이 팔자 좋아/ 큰아기 손질에 놀아난다…."
경북 문경에서 수안보 쪽으로 문경새재를 넘다 보면
길 왼편에 '문경새재 아리랑 비(碑)'가 서 있다.
대한제국 첫 번째 왕 고종의 특사로 활동한 미국인 호머 헐버트(1863~1949)가
 1896년 최초로 서양식 악보로 채록해 외국에 소개한 구전 ‘문경새재 아리랑’이다.
지난 13일 문경새재 입구에 있는 옛길박물관에서
헐버트의 한국 사랑과 아리랑 사랑을 기념하는
‘문경새재아리랑비’ 제막식이 열렸다.
가로 3m, 세로 2m의 크기의 아리랑비에는 40대 모습의 헐버트 초상화가 새겨졌다.
 1896년 헐버트가 직접 아리랑을 영어로 쓴 ‘Korean Vocal Music(한국인의 소리)’
이라는 제목의 서양 악보도 그대로 옮겨졌다.
뒷면엔 ‘헐버트를 기억하고자 기념비를 세운다’는 말도 담았다.

아리랑은 지금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 됐다.
100년 전만 해도 아리랑을 아는 세계인은 거의 없었다.
민초들 입에서 입으로 전해 온 아리랑을
서양식 악보로 처음 정리한 사람이 호머 B 헐버트였다.
문경아리랑은 헐버트가 최초로 채보(採譜)한 아리랑이다. 그는 1896년 아리랑을 세계에 알리는 논문을 쓰며
"아리랑은 한국인들에게 쌀과 같은 것"이라고 했다.
쌀이 한국인의 육신을 지켜줬듯 한국인들은
아리랑을 통해 역사의 애환을 버텨왔다는 뜻이다.
헐버트는 아리랑을 가사도 박자도 제각기 여러 가지로
부르는 한국인들을 두고 '즉흥곡의 명수'라고 했다.
미국인 헐버트는 1886년 스물셋에 이 땅에 왔다.
성(姓)의 음을 따 우리 이름을 할보(轄甫)라고 지었다.
교육자, 의사, 선교사, 언론인, 역사학자, 언어학자, 체육인, 독립운동가…. 헐버트가 한국에 젊음을 바쳐 얻은 호칭은 그렇게나 많았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말이 있다.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사랑한 사람.'
그는 3남2녀를 한국에서 낳았고
그중 딸 하나, 아들 하나를 한국에서 잃었다.
1907년 일제의 핍박을 받아 쫓겨났던 헐버트가
 다시 한국을 찾은 것은 1949년 여든여섯일 때였다.
이승만 대통령이 8·15 광복절 기념식에 그를 초청했다.
 나라 형편이 좋지 않아 비행기 표도 보낼 수 없었다.
그는 쇠약한 몸으로 미군 군용선을 타고 태평양을 건넜다.
AP 기자가 42년 만에 한국 가는 소감을 묻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오랜 소원이었다.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한다."
그리고 한국 땅에 발 디딘 지 일주일 만에 광복절과 건국 기념행사도 보지 못하고 숨을 거뒀다.
문경새재아리랑비의 건립취지문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1896년 2월 고종의 외무특사였던 호머 베자릴 헐버트 박사에 의해 발행된
영문잡지『조선유기』에 우리의 아리랑이 서양악보로 처음 기록되었다.
 여기에 '문경새재 박달나무 홍두깨 방망이로 다나가네'
의 가사가 있어 우리나라 아리랑 기록상 그 첫 시원을 알려주고 있다.
문경새재는 모든 아리랑의 고개 대명사로 알려져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수많은 사람들의 삶속에 눈물과 애환, 희망과 미래가 녹여져 있는 공간이다.
이에 문경새재 고개에 깃든 아리랑의 역사와 헐버트 박사를 기억하고자 이 기념비를 세운다.
 이천십삼년 팔월 십오일
글 문경시장 고윤환 글씨 한국서학회 명예회장 이 곤"

 

서울 와우산 자락의 공민왕사당

전설 2013. 8. 9. 05:34 Posted by 조영희

 

서울 마포구 창전동 산2번지 와우산 자락에 자리한 공민왕사당이다.
“이곳은 내가 자주 찾던 곳이다. 당(堂)을 짓고 매년 제사를 지내준다면 모든 일이 순조로울 것이다.
만일 이를 실천하지 못하면 사고가 날 것이다.”
조선 초 이곳 일대에 양곡보관 창고를 지으려할 때 동네 노인의 꿈에 공민왕이 나타나 계시한 것이다.
그 노인이 꿈에서 보인 이 자리에 와보니 과연 공민왕 부부를 그린 영정이 바위 밑 함에서 나왔다.
그래서 그 뜻에 따라 신당을 지었다.
당을 완성한 후에는 매년 10월 1일 밤 자시(子時)에 제사를 성대하게 지냈다.
 혹시라도 제사를 소홀히 하거나 불경스러울 때면
창고에 화재가 나거나 곡식을 실은 배가 풍랑에 파손되는 등 재난이 뒤따랐다.

 신당에는 공민왕과 왕비인 노국대장공주와 함께 최영장군 그 외 왕자 공주 옹주의 화상이 걸려있다.
공민왕은 왜구를 싫어하였다.
그래서인지 신당 근처에는 일본인들이 얼씬 거리는 것도 용서치 않았다.
개항 무렵과 대한제국 때는 물론 일제 때에도 일본인들이 이 근처에 오면 반드시 해코지를 당하였다.
그 후로는 일본인들이 아예 접근 조차하지 못하였다고 전한다.
<조선강안에 전해오는 이야기>를 쓴 일본인 토목기사 장목(長木)은 우연히 이곳 신당 앞을 지나게 되었다.
갑자기 창자가 뒤틀리고 온몸에서 식은땀이 나며 먹을 것을 다 토해내고 잠시 기절하였다.
그때 수염을 기르고 금색을 입은 노인이 나타나 뺨을 치면서 “썩 물러가라!”며 호통을 쳤다.
순간 정신이 들어 사방을 살펴보니
동행하였던 한국인 보조기사들이 자신을 응급조치를 한 후 데리고 병원으로 가고 있다고 했다.
 병원에서 진찰한 결과 과로로 인한 급성맹장염으로 나왔다.
 “수술 후 요양하여야 한다”는 병원 측의 진단이었다.
당시는 급병 때문에 당한 일이라는 생각에서 그냥 병원치료를 받았다.
기절한 상태에서 나타난 노인의 얼굴이 잊을 수 없었다.
몇 달 후 다시 신당을 찾았다. 처음 당한 것처럼 똑같은 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놀란 장목은 다시 그 병원에 입원하고서야
신당에서 오는 신비한 힘 때문에 빚어진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주위의 일본인들에게 서울 마포 창전동 와우산 자락에 있는
공민왕 신당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말라고 신신 당부를 하였다고 전한다.
매년 음력 10월 1일 자시에 제사를 성대하게 치른다.
이때 와우산신에게 먼저 산신제를 지내고 공민왕 사당에 제례를 올리며 마을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하였다.

서울시 지정보호수 5그루(느티나무 회화나무)가 있다.
주민들이 한때 식수로 사용하였던 신당 우물도 남아있다.

왕실에서 필요한 곡식을 저장하는 번저창과
군량미를 갈무리하는 군자창
공무원의 녹봉을 저장하는 광흥창  등 세개의 창고가 경창이다.
공민사당 앞에는 광흥창터 표석이 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이 남침을 감행했다.
국군은 계속 북한군에 밀려 개성 철원 의정부 방어선이 차례로 무너졌다.
19050년 6월 28일 새벽 미아리 방어선이 무너졌다.
국군은 극도의 혼란 속에서 철수를 시작한다.
28일과 29일 사이 한강 남안에서 철수병력의 집결을 완료할 수 있었다.
서울을 상실한 국군에게 한강은 방어에 가장 양호한 지형이었다.
이제 한강선은 국군이 적을 어떻게 방어하느냐에 따라 국가의 존망이 결정될 만큼 중요하게 되었다.
채병덕 총참모장은 한강을 연한 방어선에서 적의 진격을 저지하기로 결심하고
육군참모학교장 김홍일 소장을 시흥지구전투사령관으로 임명하고 한강선 방어임무를 부여하게 된다.
서울이 함락되자 채병덕 육군총참모장은 6월 28일 낮 12시
육군본부를 수원으로 이전하고 한강방어를 위한 조치를 취한다.
먼저 채 총참모장은 육군참모학교교장인 김홍일 장군을 총장실로 불러 한강방어를 요청한 것이다.
“선배님! 아군이 기사회생할 수 있는 길은 한강을 방어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김홍일 장군은 채 총참모장의 제안을 기꺼이 수락했다.
“총장님! 그동안 고생하셨습니다. 소관이 신명을 바쳐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8.15광복 당시 채병덕 총장은 일본군 소령 계급이었다.
김홍일 장군은 중국의 장개석의 신임을 받았던 중국군 소장 출신이었다.
채 총장은 김홍일 장군이 나이로도 약 20년 차이가 났기 때문에
군의 대 선배로 깍듯이 대접한 것이다.
김홍일 장군은 채 총장의 진정성이 넘치는 부탁에
승산이 없는 싸움인 줄 뻔히 알면서도 국가를 위해 그 제의를 기꺼이 받아들인다
 김홍일 장군은 한강선 방어를 책임지는 시흥지구전투사령관에 임명되어
1950년 6월 28일부터 7월 3일까지 최악의 상황과 조건아래서 한강선 방어의 책임을 수행하게 된다.
개전 3일 후인 6월 29일 도쿄에서 극동군 사령관인 맥아더 원수가
그 상공에서 공중전이 벌어지고 있는 수원비행장에 착륙했다.
맥아더 원수는 수원비행장에까지 친히 영접을 나왔던 이승만 대통령을 만나
요담을 나눈 후 시흥지구 전투사령부 김종갑 참모장의 안내를 받아
곧장 70세 노구로 지프차를 몰아 한강방어선을 시찰하였다.
그의 방문목적은 한국전황을 직접 살펴보고 지상군 파병의 필요성을 검토하기 위함이었다.
북한군의 막강한 일방적 포격을 받고 있는 영등포의 제8연대본부에 와서
적진을 쌍안경으로 직접 관찰하기도 하였다.
개인호에서 진지를 지키고 있던 병사를 발견하고 가까이 다가가 직접 대화를 나누었다.
그 병사는 맥아더 원수의 질문에 망설임 없이 대답한다.
"직책이 무엇인가?"
"분대장입니다."
"언제가지 여기를 지킬 것인가?"
"소대장의 명령이 있을 때까지 지킬 것입니다."
"명령이 생명보다도 중요한가?"
"네. 그렇습니다."
"끝까지 명령이 없을 때는 어찌할 것인가?"
"죽을 때까지 싸우겠습니다."
"죽는 것이 두렵지 않은가?"
"두렵지 않습니다."
"음.. 알았다. 무엇인가 필요한 것은 없는가?"
"네. 우리는 지금 (M1)소총밖에 없습니다.
적의 전차와 대포를 때려잡을 수 있는 무기가 필요합니다."
"그밖에는?"
"없습니다."
"음... 내가 여기 온 보람이 있었다.
내가 돌아가서 바로 미군 자상병과 병기를 보내주겠다.
용기를 잃지 마라."
맥아더 장군은 그 병사와의 약속을 결코 저버리지 않았다.
맥아더 장군은 한강선 시찰을 마치고 김홍일 장군에게 묻는다.
“김 장군! 지금 한강방어선은 언제까지 방어할 수 있습니까?”
김홍일 장군은 자신 있게 결연한 의지로 답변했다.
“공격과 방어의 배수 원칙을 감안할 때
앞으로 열흘 정도는 지탱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현재 한강선 도처에서 한국군이 적의 보병이 도하해 오는 것을 단호하게 격퇴시키고 있습니다.
보병끼리의 전투에서 한국군이 적에 비해 단연 우세합니다.”
맥아더 장군은 김홍일 장군의 정연한 답변에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하는 듯 했다고 한다.
맥아더장군은 한강선 시찰결과 전문을 30일 새벽 3시 미 국방부에 보낸다.
“한국전선을 시찰한 결과 한국군은 붕괴되었으며
한강방어선을 고수하고 실지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미 지상군 투입이 불가피하다.”
백악군은 그날 오전 11시 공식성명을 발표한다.
“북한 침략자를 격퇴시키고 한국의 평화를 회복시키는 데
대한민국을 지지해 달라는 유엔안전보장이사회의 요청에 응하여
트르먼 대통령은 미 공군에게 군사적으로 필요하다면
북한의 어떤 군사목표에 대해서도 공격을 수행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고
한반도의 전 연안의 해상봉쇄를 명령했다.
맥아더 장군에게는 확실한 지상부대를 사용할 권한을 부여했다.”
그리고 다음날 맥아더 원수는 긴급전보로 트루먼 대통령에게
재일(在日) 제8군의 2개 사단 병력 출동을 요청하여 승낙을 받았다.
이렇듯 맥아더 원수가 아니고서는 미국의 본격적 참전이 이렇게 급진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초대 미 8군사령관을 지낸 월턴 워커 장군(오른쪽).
왼쪽은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7월 워커 장군(앞쪽 군모를 쓴 사람)이
미군 장교들과 지도를 보면서 작전회의를 하는 모습. [중앙포토]
올해 제정된 ‘백선엽 한·미 동맹상(賞)’(이하 동맹상) 수상자로
초대 미 8군사령관을 역임한 월턴 워커(Walton H. Walker) 장군이 선정됐다고 국방부가 28일 발표했다.
국방부가 주관하고 중앙일보가 후원하는 동맹상은 한·미 동맹과 한국군 발전에 기여한 미국인을 대상으로
1년에 한 차례 시상하게 되며 첫 시상식은 9월 30일 ‘한·미동맹의 밤’ 행사에서 열린다.
국방부 당국자는 “한·미 양국의 군사동맹이 60주년을 맞았음에도
미국 측 인사에 대한 보상프로그램이 없다는 인식에 따라 상을 제정하게 됐다”며
 “지난 24일 심사위원회를 열어 워커 장군을 수상자로 선정했다”고 말했다.
시상식에는 워커 장군의 손자인 월턴 워커 2세가 참석할 예정이다.
심사위원회는 김재창 예비역 대장을 위원장으로 권오성(육군 대장) 연합사령부 부사령관
등 현역 한·미 고위 장성과 임관빈 국방부 정책실장, 김종혁 중앙일보 편집국장,
박인휘 이화여대(국제학부) 교수, 김중근 전 외교통상부 통상교섭조정관,
구본학 한림대 부총장 등으로 구성됐다.
이들은 24일 1시간50분에 걸친 토론과 투표를 거쳐 워커 장군을 선정했다.
국방부 당국자는 “워커 장군이 6·25전쟁 당시 우리나라 방위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대한민국을 지켜낸 점이 높게 평가됐다”며 “특히 낙동강 전투에서 우리나라를 지켜내는 등
혁혁한 전공과 함께 우리 군과 미군의 칭송을 받고 있는 인물이어서 초대 수상자로 적임자”라고 설명했다.
1889년 12월 3일 텍사스주 벨튼에서 출생한 그는 1912년 미국 웨스트포인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제1, 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3기갑사단장으로 참전해 승리를 거듭했으며,
특히 북아프리카 전투에서 독일군의 로멜 부대와 맞서 공훈을 세우고 중장으로 승진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영웅인 조지 패튼 장군이 가장 아꼈던 부하로 평가받았으며
‘패튼 장군의 불독’이란 별명을 얻었다.
그는 이후 48년 맥아더 장군의 부름을 받아 일본에 본부를 둔 미 8군 초대 사령관으로 부임했다.
그러다 50년 6·25전쟁이 터지자 7월 13일 낙동강 지역에 파견돼
“버티느냐 죽느냐(Stand or Die)”라며 방어선 사수 명령을 내렸다.
그는 “내가 여기서 죽더라도 끝까지 한국을 지키겠다.
철수건 전선 조정이건 어떤 것이든 뒤로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라고도 했다.
포항·영천·대구·창녕·마산·통영을 연결하는 이른바 ‘워커라인’의 방어작전은
국군과 연합군 간 최초의 연합작전이었으며 한·미 군사동맹의 시초가 됐다.
하지만 그는 6·25에 참전했던 아들 샘 워커(예비역 대장) 대위의 은성 무공훈장 수훈을 축하하기 위해
50년 12월 23일 행사장으로 가던 중 서울 도봉구 도봉동 인근에서 차량이 전복돼 숨졌다.
당시 미국 지도자들은 “워커 장군이 살아있었다면 전쟁의 양상이 달라졌을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
아들 샘 워커(88세)는 고령으로 장거리 여행이 힘들어 손자가 대신 시상식에 참석하게 됐다.
우리 정부는 워커 장군을 기려 61년 광진구 아차산 자락에
유엔군의 휴양시설을 만들며 워커힐로 명명했다.
주한미군과 유엔군이 일본이나 동남아로 휴가를 가지 않고 휴식을 취하도록
63년 완공된 워커힐은 73년 선경개발(현 SK)에 넘어가며 워커힐호텔로 바뀌었다.
정용수 기자
정용수 기자 [nkys@joongang.co.kr]
-7월 29일자 중앙일보기사를 옮겨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