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 미 8군사령관을 지낸 월턴 워커 장군(오른쪽).
왼쪽은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7월 워커 장군(앞쪽 군모를 쓴 사람)이
미군 장교들과 지도를 보면서 작전회의를 하는 모습. [중앙포토]
올해 제정된 ‘백선엽 한·미 동맹상(賞)’(이하 동맹상) 수상자로
초대 미 8군사령관을 역임한 월턴 워커(Walton H. Walker) 장군이 선정됐다고 국방부가 28일 발표했다.
국방부가 주관하고 중앙일보가 후원하는 동맹상은 한·미 동맹과 한국군 발전에 기여한 미국인을 대상으로
1년에 한 차례 시상하게 되며 첫 시상식은 9월 30일 ‘한·미동맹의 밤’ 행사에서 열린다.
국방부 당국자는 “한·미 양국의 군사동맹이 60주년을 맞았음에도
미국 측 인사에 대한 보상프로그램이 없다는 인식에 따라 상을 제정하게 됐다”며
 “지난 24일 심사위원회를 열어 워커 장군을 수상자로 선정했다”고 말했다.
시상식에는 워커 장군의 손자인 월턴 워커 2세가 참석할 예정이다.
심사위원회는 김재창 예비역 대장을 위원장으로 권오성(육군 대장) 연합사령부 부사령관
등 현역 한·미 고위 장성과 임관빈 국방부 정책실장, 김종혁 중앙일보 편집국장,
박인휘 이화여대(국제학부) 교수, 김중근 전 외교통상부 통상교섭조정관,
구본학 한림대 부총장 등으로 구성됐다.
이들은 24일 1시간50분에 걸친 토론과 투표를 거쳐 워커 장군을 선정했다.
국방부 당국자는 “워커 장군이 6·25전쟁 당시 우리나라 방위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대한민국을 지켜낸 점이 높게 평가됐다”며 “특히 낙동강 전투에서 우리나라를 지켜내는 등
혁혁한 전공과 함께 우리 군과 미군의 칭송을 받고 있는 인물이어서 초대 수상자로 적임자”라고 설명했다.
1889년 12월 3일 텍사스주 벨튼에서 출생한 그는 1912년 미국 웨스트포인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제1, 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3기갑사단장으로 참전해 승리를 거듭했으며,
특히 북아프리카 전투에서 독일군의 로멜 부대와 맞서 공훈을 세우고 중장으로 승진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영웅인 조지 패튼 장군이 가장 아꼈던 부하로 평가받았으며
‘패튼 장군의 불독’이란 별명을 얻었다.
그는 이후 48년 맥아더 장군의 부름을 받아 일본에 본부를 둔 미 8군 초대 사령관으로 부임했다.
그러다 50년 6·25전쟁이 터지자 7월 13일 낙동강 지역에 파견돼
“버티느냐 죽느냐(Stand or Die)”라며 방어선 사수 명령을 내렸다.
그는 “내가 여기서 죽더라도 끝까지 한국을 지키겠다.
철수건 전선 조정이건 어떤 것이든 뒤로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라고도 했다.
포항·영천·대구·창녕·마산·통영을 연결하는 이른바 ‘워커라인’의 방어작전은
국군과 연합군 간 최초의 연합작전이었으며 한·미 군사동맹의 시초가 됐다.
하지만 그는 6·25에 참전했던 아들 샘 워커(예비역 대장) 대위의 은성 무공훈장 수훈을 축하하기 위해
50년 12월 23일 행사장으로 가던 중 서울 도봉구 도봉동 인근에서 차량이 전복돼 숨졌다.
당시 미국 지도자들은 “워커 장군이 살아있었다면 전쟁의 양상이 달라졌을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
아들 샘 워커(88세)는 고령으로 장거리 여행이 힘들어 손자가 대신 시상식에 참석하게 됐다.
우리 정부는 워커 장군을 기려 61년 광진구 아차산 자락에
유엔군의 휴양시설을 만들며 워커힐로 명명했다.
주한미군과 유엔군이 일본이나 동남아로 휴가를 가지 않고 휴식을 취하도록
63년 완공된 워커힐은 73년 선경개발(현 SK)에 넘어가며 워커힐호텔로 바뀌었다.
정용수 기자
정용수 기자 [nkys@joongang.co.kr]
-7월 29일자 중앙일보기사를 옮겨온 것이다.-


 

 

쓰레기 산 난지도의 천지개벽

2013. 7. 25. 09:31 Posted by 조영희

 


2002년 5월 1일 서울 마포구 상암동에서 월드컵 공원 개원식이 열렸다.
공원 기념비 제막식에 참석한 고건 서울시장(왼쪽부터) 김대중 대통령
이희호 여사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의 부인인 난 아난 여사가
어린이들과 함께 박수를 치고 있다. [중앙포토]

난지도(蘭芝島).
원래는 난초와 지초, 잔디가 가득한 아름다운 섬이었다.
1978년 난지도는 서울시민이 버린 쓰레기를 묻는 장소가 됐다.
그리고 93년 매립지로서 역할을 다했다.
15년이 흐르며 거대한 쓰레기 산 2개가 만들어졌다. 악취가 대단했다.
김포공항으로 입국한 외국인들은 쓰레기 냄새를 맡으며 서울로 들어와야 했다.
서울시민은 쓰레기와 악취, 파리가 많다며 난지도를 ‘삼다도(三多島)’라 불렀다.

 

97년 김영삼정부 마지막 국무총리 때
2002년 한·일 월드컵 경기장 부지를 난지도가 있는 마포구 상암동으로 정했다. 월드컵 경기장과 공원 건설을 민선 서울시장으로서 내가 맡게 될 것이라고는 미처 생각 못했다.
서울시는 버려졌던 쓰레기 매립장을 안정화시키는 것을 넘어서
환경생태공원으로 재탄생시키기로 방침을 정했다.
우선 썩은 쓰레기에서 나오는 침출수가 한강과 주변 토양을 더 이상 오염시키지 못하게 해야 했다. 난지도 산 둘레 6㎞를 따라 콘크리트와 철판으로 만든 차수벽을 둘러쳤다. 60만㎡가 넘는 쓰레기 산 위에는 빗물이 스며들지 못하게 폴리에틸렌 차단막을 깔았다.
침출수를 정화하는 처리장도 만들었다.
냄새의 주범인 메탄가스를 뽑아내는 것도 큰 일이었다.
메탄가스를 태워 에너지로 바꾸는 열병합발전소를 건설했다.
월드컵 경기장과 상암 신도시에서 쓸 냉난방 에너지를 여기에서 공급했다.
가파른 쓰레기 산비탈이 무너지지 않도록 안정시키는 일도 어려운 과제였다.
완만하게 경사를 다시 잡고 깨끗한 흙을 덮었다. 풀과 나무를 그 위에 심었다.
쓰레기더미에서 고철·종이·합성수지를 골라내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주민들이 난지도 주변에 살았다.
이들을 이주시키고 그 주택을 철거하는 데 무척 애를 먹었다.
한동안 공사가 중단되기도 했다.
난지도 매립지 안정화 공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 그 일대에서 악취가 났다.
월드컵 개막식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큰일이었다.
코 감각이 유달리 발달한 전문가를 동원했다.
악취의 원인은 경기도 고양시 대파밭에서 비료로 쓰고 있는 닭똥으로 드러났다.
냄새 때문에 매립지 안정화 공사가 잘못 됐다는 오해를 받을 수 있었다. 대책을 세워야 했다.
냄새가 안 나는 유기질 비료를 시에서 공급했다. 다행히 악취가 모두 사라졌다.
2002년 5월 1일 불모의 땅이었던 난지도는 ‘월드컵 공원’으로 다시 태어나 시민에게 되돌아갔다.
‘평화의 공원’ ‘난지천 공원’ ‘하늘 공원’ ‘노을 공원’ ‘난지한강 공원’ 등
저마다 특징을 갖춘 다섯 개 공원으로 꾸며졌다.
맹꽁이, 촉새, 뻐꾸기와 천연기념물인 황조롱이도 공원을 찾기 시작했다.

 

김승규(66·사진) 전 서울시 SH공사 사장은 2000년부터 2002년까지
서울시 환경관리실장으로 일했다.
난지도 매립지를 월드컵 공원으로 바꾸는 작업을 현장에서 지휘했다.
- 어떻게 월드컵 공원 조성 사업을 시작했나.
 “2000년 2월 고건 서울시장이 나를 환경관리실장으로 발탁했다.
고 시장은 한·일 월드컵을 ‘환경 월드컵’으로 치러야 한다며
월드컵 공원 조성 사업을 맡겼다.
월드컵 개막 때까지는 완성해야 하는 대역사였다.”
- 어떤 것에 초점을 맞췄나.
“친환경적인 생태공원을 만드는데 중점을 뒀다.
매립지에서 나오는 메탄가스를 원래 불에 태워
공중에 날려 없애버리기로 했었다. 하지만 대기오염 문제가 있었다.
메탄가스를 열 에너지원으로 활용하기로 방향을 바꿨다.
20㎾급 풍력발전기 5개도 시범 설치했다.
2002년 5월 7일 ‘환경재생 국제 라운드테이블’에 참석한
매립지 분야 세계적 석학 6명이 월드컵 공원을 방문했는데 극찬 했다.
그동안 쌓인 피로가 싹 씻겼다.”
- 대학로에 낙산공원을 만드는 일도 맡았는데.
“난지도처럼 낙산 시민아파트도 서울의 압축 성장이 낳은 부산물이었다.
2000년 시민아파트 30동을 철거하고 주민을 이주시켜 조성했다.
어렵게 심은 소나무가 말라 가길래 나무의 하단에 물주머니를 달아
물이 일정하게 스며들 수 있도록 했다.
서울시 직원들의 아이디어였다. ”
조현숙 기자
=7월25일자 중앙일보 <남기고 싶은 이야기> 고건의 공인 50년을 옮겨온 글입니다.=



 

 

한명회와 압구정

정자 2013. 7. 21. 19:10 Posted by 조영희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74동과 72동 사이 조그만 공원이다.
중국에까지 널리 알려진 그 유명한 압구정(狎鷗亭)이 자리했던 곳이다.
조선 세조에서 성종때까지 유명한 권신이며 척신이었던 한명회(韓明澮),
그의 정자 압구정(狎鷗亭)이면서 또 그의 호 압구정(狎鷗亭)이다.
진경산수화가 겸제 정선이 그린 압구정에 관련한 두 장의 그림에서 정자를 찾아 볼 수 있다.
수려한 한강변 야트막한 언덕에 10여칸이 넘는 두 채의 한옥이 그 그림에 자태를 뽐낸다.
한강가의 풍광이 수려한 곳에 자리한 한명회의 별장 압구정은
시대를 풍미하였던 풍운아 주인 한명회만큼이나 많은 사연을 안고있다.
세조에서 성종 때까지 이어지는 그의 막강한 권세를 등에 업고 들어선 압구정이다.
그 압구정은 조선후기 철종 부마도위 박영효에게 넘어갔다.
그도 원래의 주인 한명회만큼이나 시대의 풍운가였다.
박영효가 갑신정변으로 몰락하자 압구정도 주인의 운명처럼 사라진다.

한강가 대표적인 정자 압구정은 명나라에서 이름을 지어온다.
한명회는 세조 3년 사위 예종의 세자 책봉을 받으로 명나라 사신으로 갔다.
그때 명 문신 예겸(倪謙)에게 정자의 이름과 그 기문을 지어줄 것을 부탁한다.
세종 31년 12월 명나라 경제(景帝)가 황제로 등극하였을 때다.
명은 경제의 등극을 알리려 명신 예겸을 조선에 사신으로 파견했다.
당시 세종은 몸이 아파서 누워 있었다.
세자 문종도 등창이 심하여 움직이지 못했다.
왕과 세자를 대신해서 둘째 수양군이 예겸을 맞이했다.
수양군은 신숙주 성삼문 등과 시문을 거침없이 나누던 예겸을 눈여겨 보았다.
세조는 세자 책봉 사신으로 명으로 떠나는 한명회에게
예겸을 꼭 만나고 올 것을 당부했다.
그래서 한명회는 예겸을 만났다.
한명회는 예겸을 만난 자리에서 한강가의 정자 이름을 지어줄 것을 부탁했다.
예겸은 송(宋)의 명신 한기(韓琦)가 즐겨 보내던 압구정(狎鷗亭)으로 지어준다.
한기는 서른 이전에 190만의 굶주린 사람들의 구제하였고
서하(西夏)의 오랑캐를 물리친 송의 명신이었다.
한기는 자신의 정자이름을 당대의 유명한 문장가 구양수와 함께
'압구정'이라고 지으면서 시를 보낸다.
"네가 압구정이라고 정자 이름을 지은 것을 보니
기심(機心)을 없애서 세상사람과 친하게 지내려고 하는구나!"
기심은 '조작하는 마음' '일을 꾸미는 마음'이다.
 그 일을 조작하는 마음을 없앤다면
사람에게 가까이 오지 않는 기러기와도 친하게 지낼 수 있을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니 다른 사람과는 얼마나 잘 지낼 수 있겠느냐는 말이다.
한기는 단순하게 기러기와 친하게 지내라는 뜻보다는
쿠테타로 권력을 잡은 한명회에게
기심을 버리고 정치를 잘 하라는 충고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예겸은 송의 명신 한기와 비교하여 한명회를 한껏 높여 준 것이다.
한명회는 그 정자의 이름과 그의 호도 압구정으로 정한다.
예겸의 기문이 전해지면서
명나라의 문장가들이 한명회의 압구정을 노래하는 시문을 다투어 보낸다.
조선에서도 서거정을 비롯한 많은 문인들이 압구정의 시문을 남긴다.
"임금이 하루 세 번씩 불러 총애가 흐뭇하니
정자는 있어도 와서 노는 주인이 없구나.
가슴 가운데 기심(機心)만 끊어 버린다면
비록 벼슬바다 앞에서도 갈매기와 친압(親狎)할 수 있으련만."
 최경지(崔敬止)의 압구정 시이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압구정을 노래한 대표적인 시로 꼽고 있다.


 한명회(韓明澮)는 조선전기 계유정난의 설계자로써 성공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또한 두 딸을 예종과 성종에 들이면서 왕의 장인으로서
 지략으로 당대 권력의 정점에 위치하였다.
한명회가 1487년(성종 18년) 사망한 직후
사관들이 기록한 그의 졸기 일부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권세가 매우 성하여, 따르며 아부하는 자가 많았고
손님들이 문에 가득 하였으나,
접대하기를 게을리하지 아니하여,
한 때의 재상들이 그 문에서 많이 나왔으며,
조정 관원으로서 채찍을 잡는 자까지 있었다.
성격이 번잡한 것을 좋아하고 과시하기를 기뻐하며
재물을 탐하고 색을 즐겨서
토지와 금은보화 등 뇌물이 잇달았고
집을 널리 한명회는  점유하고 어여쁜 첩들을 많이 두어
그 호사스럽고 부유함이 한 때에 떨쳤다.”
과연 그의 부와 권력을 짐작케하는 대목이다.
한명회는 세조와 운명을 같이한다.
그는 죽어서도 종묘 공신당에 세조의 공신으로 봉안된다.
세조는 불천위다.
한명회는 불천위 세조와 함께  자자손손대대로 종묘에서 제사를 받는 지위를 누린다.
세조는 세종의 世와 태조의 祖로 이루어 진 것이다.
世는 세종처럼 덕으로 조선을 다스린 성군이라는 뜻이다.
祖는 태조 이성계처럼 조선을 창업한 개국조(開國祖)라는 이야기이다.
사실 세조 이후 조선의 왕은 세조라인이다.
그는 권람의 소개로 수양군을 만난지 1년만에 계유정란으로 쿠테타를 일으킨다.
그때 정란공신 1등공신이 된다.
세조로 수양군이 왕이 될 때 좌익공신 1등공신이 된다.
또 사위 예종이 왕으로  즉위한다.
이때 남이와 강순을 제거하는 데 앞장선다.
익대공신 1등공신이 된다.
성종이 왕위에 오른다. 이때 구성군 등을 제거한다.
좌리공신 1등공신이 되는 등 4번의 1등공신이나 된다.
그 세째 딸이 예종의 부인이 되고 네째 딸은 성종의 부인이 된다.
두 명의 왕비를 배출한 척신이 한명회다.

 
한명회는 태종 16년(1415)에 청주한씨 명문에 태어났다.
그러나, 임신 7개월만에 출생해서 유모가 오래도록 밀실에서 보양하였다.
자라면서부터는 체격이 좋아지고 행동이 비범하여 많은 사람들의 주의를 끌었다.
초반에는 산수간을 방랑하는 등 그 형색이 좋지 못해서
문종 2년(1451)에 겨우 개성의 경덕궁직이로 있었다.
당시의 문신인 권람과 친해서 수양대군(세조)에게 알려지게 되고,
뒤이어 수양으로부터 '나의 자방(子房)'이라는 찬사와 신임까지 받았다.
그는 친화력과 지모와 리더십을 갖춘 인물임이 74세까지 살아가는 생애에서 곳곳에 묻어난다.
그는 의리가 대단한 인물로 평가된다.
개성에 경덕궁 말단으로 일하던 시절이다.
한양에서 간 관리들이 '송도계'를 만들어 친목을 도모한다.
한명회가 계원으로 동참하기를 요청한다.
계원들은 "경덕궁직으로 있는 사람과 자리를 함께 할 수 없다"고 거절한다.
권철영이라는 사람이 앞장서 한명회를 송도계원으로 가입시킨다.
계유정란으로 실세로 급부상한 한명회에게 송도계원들이 줄을 대기위하여 갖가지 노력을 한다.
"한명회를 송도계원으로 가입시킨 네라면
 한명회를 움직일 수 있을 텐데 너는 왜 한명회를 찾지 않느냐?"
송도계원들이 권철영을 찾아 졸라댄다.
 정작 권철영은 한명회를 찾지 않았다고 한다.
한명회는 권철영은 집으로 찾아간다.
그에게 관직을 주선해 주었다고 한다.
이때 '송도계원'이라는 말이 세간에 회자된다.
'조그만 지위나 세력을 믿고 남을 멸시하는 사람'을 풍자한 송도계원이다.
1970년대 대부분 배밭이었던 압구정 일대였다.
그 배밭에 부촌 압구정아파트촌을 형성하면서 또다른 명성을 얻는다.
'압구정문화'가 탄생한다. 오늘날 압구정문화의 뿌리 압구정이다.
압구정동이 개발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초반이었다.
압구정동 배밭과 벌판에 첫 삽을 뜬 후 불도저 소리를 내며
지형을 바꾸어 나간 건설업체는 현대건설이었다.
1970년 4월 압구정동 366~371번지 일대 4만8천여 평의 공유수면 매립공사를 시작한다.
이 후 현대아파트 23개동 1,562 가구를 건립했다.
이 지역은 경기도 시흥군 신동면과 광주군 언주면 지역이었다.
1963년 1월 신동면 지역은 영등포구로,
언주면 지역은 성동구로 편입되었다가 1975년 10월 강남구가 신설되었다.
1979년 10월 강남구에서 강동구가 나누어졌고
1988년 1월 강남구에서 서초구가 나누어졌다.
압구정동으로 대변되는 아파트 건설붐은 강남 땅투기와 '복부인'을 탄생시켰다.
1970년대 후반 부동산 경기가 과열되면서 투기가 횡행했다.
아파트 단지 주변에는 토지 투기로 돈을 벌고자 하는 부인들의 발길이 잦아졌다.
주변에선 이들을 '강남 복부인'이라 했다.
땅을 많이 가졌던 사람들이 돈방석에 앉게 되면서
'강남 졸부'란 말도 함께 생겨났다.
1980년대 후반에는 부모가 쉽게 번 돈을 헤프게 써 버리는
젊은 소비계 층이 생겨나면서 '오렌지족'이란 말도 나왔다.
상대적으로 좁은 면적에 밀집된 아파트 인구가 구매력까지 갖추다 보니 상가도 집중적으로 들어섰다.
여기에 최첨단 살롱, 까페 등이 확산되면서 압구정 일대는 유행의 첨단지역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미국의 헐리웃을 본딴 '로데오 거리'라는 이름도 생겨났다.
이는 외국 문화가 본격적으로 유입되기 시작한 당시 풍조를 잘 대변해 준다. 
압구정문화의 단면을 보여주는 '로데오 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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