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어, 금원과 란사의 사랑이야기

전설 2015. 11. 15. 22:43 Posted by 조영희

행주나루 터 앞 돌빵구지라는 마을에 ‘금원’이라는 소년이 살았다.
 ‘금원’은 부모님을 여의어 혼자 힘으로 한강에서 고기를 잡아 생계를 이어갔고,
어릴 적 몸을다쳐 등이 굽었지만 한강을 벗 삼아 살아가는 심신이 강인한 소년이었다.
행주나루 부근 한강에는 팔도에서 희귀하기로 유명한 웅어가 잡혔다.
 어찌나 희귀하였는지 임금님만 드실 수 있도록 국법으로 정해져 있을 정도였다.
이 법을 어기는 자는 돌빵구지 동굴에 있는 석빙고에 갇혀 죽는 끔찍한 형벌을 받도록 되어 있었다.
따뜻한 봄날, 한양에 사는 정 판서라는 사람의 셋째 딸 ‘란사’가 행주나루로 오게되었다.
‘란사’는 창백한 얼굴에 몸이 가녀린 소녀였다.
 날 때부터 몸이 약했던‘란사’는 늘 잔병치레를 하였는데 한양의 어느 의원이 이르는 대로
행주나루로 요양을 오게 된 것이다.
 나무를 하러 산에 오르던 금원은 진달래꽃을 안은 채 산에서 내려오고 있는 ‘란사’와
 마주치게 되는데 마치 살아있는 선녀의 모습으로 보였다.
그날 이후 ‘금원’은 ‘란사’를 한시도 잊을 수가 없었다.
‘란사’의 병세는 악화돼 외출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쇠약해졌다.
소식을 들은 ‘금원’도 식음을 전폐하고 앓기 시작했다.
‘란사’에 대한 그리움과 걱정으로 병든 것이다.
하루는 금원을 가엾이 여긴 주지스님이 그를 찾아와 이렇게 말했다.
“란사의 병을 낫게 하려거든한강에 사는 웅어를 먹게 해주어라.”
‘란사’를 살릴 수 있다는 생각에 다시 기운을차린 ‘금원’은 한강으로 가 웅어를 잡기 시작했다.
오직 ‘란사’의 건강이 회복되기만을 기원했다.
한강의 중심을 향해 노를 젓던 중 갑자기 파도가 치더니 웅어 한마리가 ‘금원’의 앞으로 툭 떨어졌다.
 기쁜 마음으로 웅어를 정 판서에게 전달한 ‘금원’은 다음 날 스스로 석빙고로 들어가 얼어 죽는다.
 ‘란사’는 웅어를 먹고 기적처럼 몸이 회복되어 ‘금원’을 찾아가 감사의 말을 전하려 했다.
돌빵구지 마을로찾아갔지만 ‘금원’은 없었다.
그러다 웅어를 잡은 죄로 석빙고에 갇혀 죽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듣게 되고 충격에 빠진다.
 얼마나 흘렀는지 돌빵구지 마을에서는 더 이상 ‘란사’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석빙고 속에 또 하나의 얼음사람이 생겼다는 소문만 무성하게 돌고 있었다.
또 누군가는 해질 무렵 두 마리의 웅어가 힘차게 한강에서 노닐다 무지개 속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보았다고도 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친 용감한 소년 ‘금원’과
그의 깊은 사랑에 보답하고자 같은 길을 따른 ‘란사’의 사랑이야기는
오래도록 돌빵구지 마을 사람들에게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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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한강사』에서 옮긴 글이다.

마포의 담담정

정자 2015. 9. 6. 07:21 Posted by 조영희

 

 담담정은 조선 초에 안평대군이 지은 정자이다.
안평대군은 이 정자에 만여 권의 책을 쌓아두고 시회(詩會)를 베풀곤 했으며
이 정자에 거둥하여 중국의 배를 구경하고 각종의 화포를 쏘는 것을 구경하였다.
이후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하고, 야인정벌에 공을 세운 영의정 신숙주의 별장이 되었다.
 이 정자 터에는 마포장이 지어져 광복 후 이승만 대통령이 잠시 머물기도 하였다.

현재 벼랑고개 위 벽산빌라 앞에는 담담정이 있던 곳이라는 표지석이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담담정은 조선 초에 안평대군이 지은 정자다.
안평대군은 이 정자에 만여 권의 책을 쌓아두고 시회(詩會)를 베풀곤 했으며
이 정자에 거둥하여 중국의 배를 구경하고 각종의 화포를 쏘는 것을 구경하였다.
이후 세종 때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하고, 야인정벌에 공을 세웠으며
네 번이나 영의정을 지낸 신숙주의 별장이 되었다.
이 정자 터에는 마포장이 지어져 광복 후 이승만 대통령이 잠시 머물기도 하였다.”

아래의 사진과 글은 '김달진미술연구소' 홈페이지의 글 '사라진 전설, 담담정 : 김석신, 담담장락'에서
그대로 옮겨온 것이다.

김정호(金正浩1804-1866)가 1861년에 제작한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를 보면 만초천(蔓草川넝쿨내)이라는 냇물이 뚜렷하다. 넝쿨내는 지금 원효대교(元曉大橋)에서 용산전자상가를 거쳐 용산역 쯤에서 한 줄기는 이태원, 목멱산(木覓山*남산)까지,
또 한 줄기는 청파로(靑坡路), 서울역, 독립문, 모악산(母岳山)까지 거슬러 오른다.
지금은 온통 시멘트로 뒤덮여 냇물이 있었는지조차 모르지만 1967년 복개공사 이전까지는 엄연한 냇가였다. 이곳에 넘쳐드는 물을 막으려 강바닥 파내는 준천(濬川)을 되풀이하던 중 1914년부터 아예 제방(堤防)을, 1967년엔 복개(覆蓋)를 하고 말았다.
이곳 서호(西湖)는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 일찍이 백제(百濟) 기루왕(己婁王재위77-111) 때 두마리 용이 나타났으므로 용산호(龍山湖)라 불렀는데 이중환(李重煥1680-1752)이 <<택리지(擇里志)>>에 쓴 것처럼 조선개국 직후 서쪽 염창(鹽倉) 모래언덕이 무너져 한강 조수(潮水)가 통하기 시작함에 팔도의 화물을 수송하는 배가 모두 용산에 정박(碇泊)하기 시작했다.
그림에 줄지어 선 선박(船舶)이 이웃 마포(麻浦)와 더불어 조선 최대의 포구(浦口) 유통기지임을 드러내고
 넝쿨내 건너 남산 아래 줄지어 선 기와집 또한 상가(商街)며 창고(倉庫)가 즐비하여 번화한 상업지대임을 알려주고 있다.저 넝쿨내가 한강 서호 또는 용산호에 섞일 즈음 바위가 치솟아 절경을 이루었으니 고려(高麗)의 왕들이 즐겨 찾던 곳이었다.
 조선(朝鮮)개국 초였을까, 위태로운 끝자리에 누각 하나 세워 읍청루(揖淸樓)요, 그윽한 안쪽에 정자 하나 세워 담담정(澹澹亭)이라 아름다움 만만치 않았다.
유본예(柳本藝1778-1842)가 <<한경지략(漢京識略)>>에 이르기를, 안평대군 이용(安平大君李瑢1418-1453)이 “담담정을 짓고 만 권의 서적을 쌓아두고 문사(文士) 들을 모아 혹 밤새도록 등불을 밝히고 담화를 하며, 혹은 배를 타고 달밤에 놀이를 했다”고 하였다.
계유정난(癸酉靖難)으로 안평대군이 살해당하자 신숙주(申叔舟1417-1475)가 이곳을 차지하였다.
서용보(徐龍輔1757-1824)와 이재학(李在學1745-1806) 일행이 어쩌면 압구정(狎鷗亭)을 거쳐 내친 김에 담담정까지 내려왔을지 모르겠다.
김석신(金碩臣1758-1816이후)도 함께 하였을 터 당연히 그 풍경 그렸을 게다.
압구정에도 일곱 사람인데 담담정에도 일곱이니 그러려니 하지만 서용보 일행이 아니면 또 어떤가.
오히려 절벽 아래 포구 옆 빨래하는 여염(閭閻) 아낙네가 정겹고 그 방망이 소리 울려 퍼져 건너편 동쪽 버드나무 더욱 흐드러진다. 뿐만 아니라 그림 속 넝쿨내는 ‘새벽 빛나는 냇물’이라 욱천(旭川)이란 이름도 갖고 있었거니와 주민들이 밤마다 불 밝히고 게 잡는 풍광이 장관을 이루었다.
<화폭 오른쪽부터 아래쪽까지 훤한 모래 들판[白沙場]인데 지금 서울역부터 용산역을 거쳐 한강철교까지 풍경이다. 탁트인 시야가 그 맑고 그윽한 즐거움 베푸는데 더없이 어울렸음에랴,
북벌(北伐)의 꿈을 키우던 효종(孝宗1619-1659*재위1649-1659)은 1655년 9월 29일 일만군병(軍兵)을 강 건너 노량진(露梁津)에 집결시켜 삼엄한 열무식(閱武式)으로 군기(軍紀)를 치켜세우기도 하였건만
1876년 개항 이래 이태원부터 용산까지 일본인이 몰려들어 조선침략의 전진기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곳 용산 백사장에서 강 건너 노량진까지 배다리[舟橋]를 놓곤 했었는데
정조(正祖1752-1800 *재위 1776-1800)는 빈번한 화성(華城*水原) 길 번거로움 줄이고자 청파동 징검다리에 주교사(舟橋司)란 관청을 설치하였다. 그 징검다리를 청파동 배다리라고 불렀거니와 1926년 무렵 없어진 이 징검다리는 숱한 화제를 낳았다.
광해(光海1575-1641 * 재위1608-1623) 시절 징검다리에서 밤마다 상서로운 빛이 솟아났다.
파내보니 현판이 나왔는데 임진왜란 때 잃어버린 숭례문(崇禮門*南大門) 현판이었다. 양녕대군 이제가 쓴 현판 글씨를 되찾았으니 왕위를 아우에게 물려주고 자유인으로 살아갔던 양녕대군을 사랑해마지 않던 숱한 민인(民人)들에겐 너무도 즐거운 이야기라 더욱이 글씨의 주인이 누구인지 밝혀둔 <<추강냉화(秋江冷話)>>의 지은이가 생육신(生六臣) 남효온(南孝溫1454-1492)이니 그 이야 끝도 가도 없이 퍼져나가 전설로 바뀌었던 게다. 문장사대가(文章四大家)로 이름 높던 이정귀(李廷龜1564-1635)가 사라져버린 담담정 터에서 옛노래 불렀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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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방어선전략

한강이야기 2014. 2. 5. 19:55 Posted by 조영희

1950년 6월 25일 북한이 남침을 감행했다.
국군은 계속 북한군에 밀려 개성 철원 의정부 방어선이 차례로 무너졌다.
19050년 6월 28일 새벽 미아리 방어선도 무너졌다.
국군은 극도의 혼란 속에서 철수를 시작한다.
28일과 29일 사이 한강 남안에서 철수병력의 집결을 완료할 수 있었다.
서울을 상실한 국군에게 한강은 방어에 가장 양호한 지형이었다.
이제 한강선은 국군이 적을 어떻게 방어하느냐에 따라
이 국가의 존망이 결정될 만큼 중요하게 되었다.
채병덕 총참모장은 한강을 연한 방어선에서 적의 진격을 저지하기로 결심한다.
육군참모학교장 김홍일 소장을 시흥지구전투사령관으로 임명하고 한강선 방어임무를 맡겼다.
서울이 함락되자 채병덕 육군총참모장은 6월 28일 낮 12시.
육군본부를 수원으로 이전하고 한강방어를 위한 조치를 취한다.
채 총참모장은 육군참모학교교장인 김홍일 장군을 총장실로 불러 한강방어를 요청한 것이다.
“선배님! 아군이 기사회생할 수 있는 길은 한강을 방어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김홍일 장군은 채 총참모장의 제안을 기꺼이 수락했다.
“총장님! 그동안 고생하셨습니다. 소관이 신명을 바쳐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8.15광복 당시 채병덕 총장은 일본군 소령 계급이었다.
김홍일 장군은 중국의 장개석의 신임을 받았던 중국군 소장 출신이었다.
채 총장은 김홍일 장군이 나이로도 약 20년 차이가 났기 때문에
군의 대 선배로 깍듯이 대접한 것이다.
김홍일 장군은 채 총장의 진정성이 넘치는 부탁에
승산이 없는 싸움인 줄 뻔히 알면서도 국가를 위해 그 제의를 기꺼이 받아들인다
1950년 6월 28일부터 7월 3일까지 최악의 상황과 조건이었다.
그럼에도 김홍일장군은 한강선 방어를 책임지는 시흥지구전투사령관에 임명되어
한강선 방어의 책임을 수행하게 된다.
개전 3일 후인 6월 29일 도쿄에서 극동군 사령관인 맥아더 원수가
그 상공에서 공중전이 벌어지고 있는 수원비행장에 착륙했다.
맥아더 원수는 수원비행장에까지 친히 영접을 나왔던 이승만 대통령을 만나
요담을 나눈 후 시흥지구 전투사령부 김종갑 참모장의 안내를 받아
곧장 70세 노구로 지프차를 몰아 한강방어선을 시찰하였다.
그의 방문목적은 한국전황을 직접 살펴보고 지상군 파병의 필요성을 검토하기 위함이었다.
북한군의 막강한 일방적 포격을 받고 있는 영등포의 제8연대본부에 와서
적진을 쌍안경으로 직접 관찰하기도 하였다.
개인호에서 진지를 지키고 있던 병사를 발견하고 가까이 다가가 직접 대화를 나누었다.
그 병사는 맥아더 원수의 질문에 망설임 없이 대답한다.
"직책이 무엇인가?"
"분대장입니다."
"언제가지 여기를 지킬 것인가?"
"소대장의 명령이 있을 때까지 지킬 것입니다."
"명령이 생명보다도 중요한가?"
"네. 그렇습니다."
"끝까지 명령이 없을 때는 어찌할 것인가?"
"죽을 때까지 싸우겠습니다."
"죽는 것이 두렵지 않은가?"
"두렵지 않습니다."
"음.. 알았다. 무엇인가 필요한 것은 없는가?"
"네. 우리는 지금 (M1)소총밖에 없습니다.
적의 전차와 대포를 때려잡을 수 있는 무기가 필요합니다."
"그밖에는?"
"없습니다."
"음... 내가 여기 온 보람이 있었다.
내가 돌아가서 바로 미군 자상병과 병기를 보내주겠다.
용기를 잃지 마라."
맥아더 장군은 그 병사와의 약속을 결코 저버리지 않았다.
맥아더 장군은 한강선 시찰을 마치고 김홍일 장군에게 묻는다.
“김 장군! 지금 한강방어선은 언제까지 방어할 수 있습니까?”
김홍일 장군은 자신 있게 결연한 의지로 답변했다.
“공격과 방어의 배수 원칙을 감안할 때
앞으로 열흘 정도는 지탱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현재 한강선 도처에서 한국군이 적의 보병이 도하해 오는 것을 단호하게 격퇴시키고 있습니다.
보병끼리의 전투에서 한국군이 적에 비해 단연 우세합니다.”
맥아더 장군은 김홍일 장군의 정연한 답변에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하는 듯 했다고 한다.
맥아더장군은 한강선 시찰결과 전문을 30일 새벽 3시 미 국방부에 보낸다.
“한국전선을 시찰한 결과 한국군은 붕괴되었으며
한강방어선을 고수하고 실지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미 지상군 투입이 불가피하다.”
백악군은 그날 오전 11시 공식성명을 발표한다.
“북한 침략자를 격퇴시키고 한국의 평화를 회복시키는 데
대한민국을 지지해 달라는 유엔안전보장이사회의 요청에 응하여
트르먼 대통령은 미 공군에게 군사적으로 필요하다면
북한의 어떤 군사목표에 대해서도 공격을 수행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고
한반도의 전 연안의 해상봉쇄를 명령했다.
맥아더 장군에게는 확실한 지상부대를 사용할 권한을 부여했다.”
그리고 다음날 맥아더 원수는 긴급전보로 트루먼 대통령에게
재일(在日) 제8군의 2개 사단 병력 출동을 요청하여 승낙을 받았다.
맥아더 원수가 아니고서는 미국의 본격적 참전이
이렇게 급진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1950년 6월 28일 오전 2시 30분 한강 인도교와 철교가 폭파됨으로써
한강 이북의 수도 서울은 완전히 북괴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아군은 한강이라는 자연적인 장애물을 이용하여
저지선을 구축하고 북괴군의 도하를 막게 되었다.
김홍일 사령관은 유재흥 준장을 제7사단장에 임명하여 노량진 방면에 배치했다.
이종찬대령을 수도사단장으로 임명과 동시에 영등포 방면에 포진케 하였다.
한강 저지선의 서쪽에서는 김포지구 전투사령부가 김포 비행장과 오류동 일대에서
북괴군의 진출을 억제하며 측면 지원을 하고 있었다.
서울을 점령한 북괴군은 제3사단 제4사단 제105 전차여단에게
 ‘서울사단’이라는 칭호를 부여하는 등 기세가 등등했다.
미군을 포함한 국제연합군이 내원하기 전에 국군의 주력 부대를 섬멸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6월 29일 밤부터 북괴군은 한강 도하작전을 시작하였다.
북괴 제3사단은 30일 새벽에 서빙고에서 도하하여
동작동과 흑석동을 잇는 고지로 진출을 시도하였다.
그들의 계획은 노량진 부근의 고지대를 장악하여
그 엄호 아래 폭파에 실패한 한강철교를 이용하여 전차를 도하시키려는 것이었다.
여기에서는 북괴군이 전차의 지원을 받지 못한다는 사실에
고무된 우리 국군은 대등한 조건 속에서 북괴군 제3사단을 공격하여
커다란 타격을 가하면서 7월 3일까지 그들이 한강을 건너지 못하도록 저지하였다.
영등포 방면에서는 국군 제8연대와 제18연대의 일부 병력이
6월 27일부터 7월 3일까지 수차례에 걸쳐 북괴군의 공격을 격퇴하면서 여의도를 확보하고 있었다.
북괴군은 불완전하게 파괴된 한강의 복선철교를 수리한다.
마침내 7월 3일을 기하여 전차를 도하시키고 이를 앞세워 영등포 방면으로 진출하기 시작한다.
국군의 한강 저지선은 붕괴되고 서울은 완전히 공산군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었다.
김홍일장군의 시흥지구전투사령부는 한강방어선을 6일동안이나 지켜냄으로써
국군이 전열을 정비할 수 있었다.
미국이 한국전에 참전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얻어내는 기대이상의 큰 성과를 거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