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머 헐버트의 문경새재아리랑

한강이야기 2013. 8. 16. 10:20 Posted by 조영희

 

"문경새재 물박달나무/ 홍두깨 방망이로 다 나간다/ …/
홍두깨 방망이 팔자 좋아/ 큰아기 손질에 놀아난다…."
경북 문경에서 수안보 쪽으로 문경새재를 넘다 보면
길 왼편에 '문경새재 아리랑 비(碑)'가 서 있다.
대한제국 첫 번째 왕 고종의 특사로 활동한 미국인 호머 헐버트(1863~1949)가
 1896년 최초로 서양식 악보로 채록해 외국에 소개한 구전 ‘문경새재 아리랑’이다.
지난 13일 문경새재 입구에 있는 옛길박물관에서
헐버트의 한국 사랑과 아리랑 사랑을 기념하는
‘문경새재아리랑비’ 제막식이 열렸다.
가로 3m, 세로 2m의 크기의 아리랑비에는 40대 모습의 헐버트 초상화가 새겨졌다.
 1896년 헐버트가 직접 아리랑을 영어로 쓴 ‘Korean Vocal Music(한국인의 소리)’
이라는 제목의 서양 악보도 그대로 옮겨졌다.
뒷면엔 ‘헐버트를 기억하고자 기념비를 세운다’는 말도 담았다.

아리랑은 지금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 됐다.
100년 전만 해도 아리랑을 아는 세계인은 거의 없었다.
민초들 입에서 입으로 전해 온 아리랑을
서양식 악보로 처음 정리한 사람이 호머 B 헐버트였다.
문경아리랑은 헐버트가 최초로 채보(採譜)한 아리랑이다. 그는 1896년 아리랑을 세계에 알리는 논문을 쓰며
"아리랑은 한국인들에게 쌀과 같은 것"이라고 했다.
쌀이 한국인의 육신을 지켜줬듯 한국인들은
아리랑을 통해 역사의 애환을 버텨왔다는 뜻이다.
헐버트는 아리랑을 가사도 박자도 제각기 여러 가지로
부르는 한국인들을 두고 '즉흥곡의 명수'라고 했다.
미국인 헐버트는 1886년 스물셋에 이 땅에 왔다.
성(姓)의 음을 따 우리 이름을 할보(轄甫)라고 지었다.
교육자, 의사, 선교사, 언론인, 역사학자, 언어학자, 체육인, 독립운동가…. 헐버트가 한국에 젊음을 바쳐 얻은 호칭은 그렇게나 많았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말이 있다.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사랑한 사람.'
그는 3남2녀를 한국에서 낳았고
그중 딸 하나, 아들 하나를 한국에서 잃었다.
1907년 일제의 핍박을 받아 쫓겨났던 헐버트가
 다시 한국을 찾은 것은 1949년 여든여섯일 때였다.
이승만 대통령이 8·15 광복절 기념식에 그를 초청했다.
 나라 형편이 좋지 않아 비행기 표도 보낼 수 없었다.
그는 쇠약한 몸으로 미군 군용선을 타고 태평양을 건넜다.
AP 기자가 42년 만에 한국 가는 소감을 묻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오랜 소원이었다.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한다."
그리고 한국 땅에 발 디딘 지 일주일 만에 광복절과 건국 기념행사도 보지 못하고 숨을 거뒀다.
문경새재아리랑비의 건립취지문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1896년 2월 고종의 외무특사였던 호머 베자릴 헐버트 박사에 의해 발행된
영문잡지『조선유기』에 우리의 아리랑이 서양악보로 처음 기록되었다.
 여기에 '문경새재 박달나무 홍두깨 방망이로 다나가네'
의 가사가 있어 우리나라 아리랑 기록상 그 첫 시원을 알려주고 있다.
문경새재는 모든 아리랑의 고개 대명사로 알려져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수많은 사람들의 삶속에 눈물과 애환, 희망과 미래가 녹여져 있는 공간이다.
이에 문경새재 고개에 깃든 아리랑의 역사와 헐버트 박사를 기억하고자 이 기념비를 세운다.
 이천십삼년 팔월 십오일
글 문경시장 고윤환 글씨 한국서학회 명예회장 이 곤"

 

서울 와우산 자락의 공민왕사당

전설 2013. 8. 9. 05:34 Posted by 조영희

 

서울 마포구 창전동 산2번지 와우산 자락에 자리한 공민왕사당이다.
“이곳은 내가 자주 찾던 곳이다. 당(堂)을 짓고 매년 제사를 지내준다면 모든 일이 순조로울 것이다.
만일 이를 실천하지 못하면 사고가 날 것이다.”
조선 초 이곳 일대에 양곡보관 창고를 지으려할 때 동네 노인의 꿈에 공민왕이 나타나 계시한 것이다.
그 노인이 꿈에서 보인 이 자리에 와보니 과연 공민왕 부부를 그린 영정이 바위 밑 함에서 나왔다.
그래서 그 뜻에 따라 신당을 지었다.
당을 완성한 후에는 매년 10월 1일 밤 자시(子時)에 제사를 성대하게 지냈다.
 혹시라도 제사를 소홀히 하거나 불경스러울 때면
창고에 화재가 나거나 곡식을 실은 배가 풍랑에 파손되는 등 재난이 뒤따랐다.

 신당에는 공민왕과 왕비인 노국대장공주와 함께 최영장군 그 외 왕자 공주 옹주의 화상이 걸려있다.
공민왕은 왜구를 싫어하였다.
그래서인지 신당 근처에는 일본인들이 얼씬 거리는 것도 용서치 않았다.
개항 무렵과 대한제국 때는 물론 일제 때에도 일본인들이 이 근처에 오면 반드시 해코지를 당하였다.
그 후로는 일본인들이 아예 접근 조차하지 못하였다고 전한다.
<조선강안에 전해오는 이야기>를 쓴 일본인 토목기사 장목(長木)은 우연히 이곳 신당 앞을 지나게 되었다.
갑자기 창자가 뒤틀리고 온몸에서 식은땀이 나며 먹을 것을 다 토해내고 잠시 기절하였다.
그때 수염을 기르고 금색을 입은 노인이 나타나 뺨을 치면서 “썩 물러가라!”며 호통을 쳤다.
순간 정신이 들어 사방을 살펴보니
동행하였던 한국인 보조기사들이 자신을 응급조치를 한 후 데리고 병원으로 가고 있다고 했다.
 병원에서 진찰한 결과 과로로 인한 급성맹장염으로 나왔다.
 “수술 후 요양하여야 한다”는 병원 측의 진단이었다.
당시는 급병 때문에 당한 일이라는 생각에서 그냥 병원치료를 받았다.
기절한 상태에서 나타난 노인의 얼굴이 잊을 수 없었다.
몇 달 후 다시 신당을 찾았다. 처음 당한 것처럼 똑같은 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놀란 장목은 다시 그 병원에 입원하고서야
신당에서 오는 신비한 힘 때문에 빚어진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주위의 일본인들에게 서울 마포 창전동 와우산 자락에 있는
공민왕 신당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말라고 신신 당부를 하였다고 전한다.
매년 음력 10월 1일 자시에 제사를 성대하게 치른다.
이때 와우산신에게 먼저 산신제를 지내고 공민왕 사당에 제례를 올리며 마을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하였다.

서울시 지정보호수 5그루(느티나무 회화나무)가 있다.
주민들이 한때 식수로 사용하였던 신당 우물도 남아있다.

왕실에서 필요한 곡식을 저장하는 번저창과
군량미를 갈무리하는 군자창
공무원의 녹봉을 저장하는 광흥창  등 세개의 창고가 경창이다.
공민사당 앞에는 광흥창터 표석이 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이 남침을 감행했다.
국군은 계속 북한군에 밀려 개성 철원 의정부 방어선이 차례로 무너졌다.
19050년 6월 28일 새벽 미아리 방어선이 무너졌다.
국군은 극도의 혼란 속에서 철수를 시작한다.
28일과 29일 사이 한강 남안에서 철수병력의 집결을 완료할 수 있었다.
서울을 상실한 국군에게 한강은 방어에 가장 양호한 지형이었다.
이제 한강선은 국군이 적을 어떻게 방어하느냐에 따라 국가의 존망이 결정될 만큼 중요하게 되었다.
채병덕 총참모장은 한강을 연한 방어선에서 적의 진격을 저지하기로 결심하고
육군참모학교장 김홍일 소장을 시흥지구전투사령관으로 임명하고 한강선 방어임무를 부여하게 된다.
서울이 함락되자 채병덕 육군총참모장은 6월 28일 낮 12시
육군본부를 수원으로 이전하고 한강방어를 위한 조치를 취한다.
먼저 채 총참모장은 육군참모학교교장인 김홍일 장군을 총장실로 불러 한강방어를 요청한 것이다.
“선배님! 아군이 기사회생할 수 있는 길은 한강을 방어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김홍일 장군은 채 총참모장의 제안을 기꺼이 수락했다.
“총장님! 그동안 고생하셨습니다. 소관이 신명을 바쳐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8.15광복 당시 채병덕 총장은 일본군 소령 계급이었다.
김홍일 장군은 중국의 장개석의 신임을 받았던 중국군 소장 출신이었다.
채 총장은 김홍일 장군이 나이로도 약 20년 차이가 났기 때문에
군의 대 선배로 깍듯이 대접한 것이다.
김홍일 장군은 채 총장의 진정성이 넘치는 부탁에
승산이 없는 싸움인 줄 뻔히 알면서도 국가를 위해 그 제의를 기꺼이 받아들인다
 김홍일 장군은 한강선 방어를 책임지는 시흥지구전투사령관에 임명되어
1950년 6월 28일부터 7월 3일까지 최악의 상황과 조건아래서 한강선 방어의 책임을 수행하게 된다.
개전 3일 후인 6월 29일 도쿄에서 극동군 사령관인 맥아더 원수가
그 상공에서 공중전이 벌어지고 있는 수원비행장에 착륙했다.
맥아더 원수는 수원비행장에까지 친히 영접을 나왔던 이승만 대통령을 만나
요담을 나눈 후 시흥지구 전투사령부 김종갑 참모장의 안내를 받아
곧장 70세 노구로 지프차를 몰아 한강방어선을 시찰하였다.
그의 방문목적은 한국전황을 직접 살펴보고 지상군 파병의 필요성을 검토하기 위함이었다.
북한군의 막강한 일방적 포격을 받고 있는 영등포의 제8연대본부에 와서
적진을 쌍안경으로 직접 관찰하기도 하였다.
개인호에서 진지를 지키고 있던 병사를 발견하고 가까이 다가가 직접 대화를 나누었다.
그 병사는 맥아더 원수의 질문에 망설임 없이 대답한다.
"직책이 무엇인가?"
"분대장입니다."
"언제가지 여기를 지킬 것인가?"
"소대장의 명령이 있을 때까지 지킬 것입니다."
"명령이 생명보다도 중요한가?"
"네. 그렇습니다."
"끝까지 명령이 없을 때는 어찌할 것인가?"
"죽을 때까지 싸우겠습니다."
"죽는 것이 두렵지 않은가?"
"두렵지 않습니다."
"음.. 알았다. 무엇인가 필요한 것은 없는가?"
"네. 우리는 지금 (M1)소총밖에 없습니다.
적의 전차와 대포를 때려잡을 수 있는 무기가 필요합니다."
"그밖에는?"
"없습니다."
"음... 내가 여기 온 보람이 있었다.
내가 돌아가서 바로 미군 자상병과 병기를 보내주겠다.
용기를 잃지 마라."
맥아더 장군은 그 병사와의 약속을 결코 저버리지 않았다.
맥아더 장군은 한강선 시찰을 마치고 김홍일 장군에게 묻는다.
“김 장군! 지금 한강방어선은 언제까지 방어할 수 있습니까?”
김홍일 장군은 자신 있게 결연한 의지로 답변했다.
“공격과 방어의 배수 원칙을 감안할 때
앞으로 열흘 정도는 지탱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현재 한강선 도처에서 한국군이 적의 보병이 도하해 오는 것을 단호하게 격퇴시키고 있습니다.
보병끼리의 전투에서 한국군이 적에 비해 단연 우세합니다.”
맥아더 장군은 김홍일 장군의 정연한 답변에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하는 듯 했다고 한다.
맥아더장군은 한강선 시찰결과 전문을 30일 새벽 3시 미 국방부에 보낸다.
“한국전선을 시찰한 결과 한국군은 붕괴되었으며
한강방어선을 고수하고 실지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미 지상군 투입이 불가피하다.”
백악군은 그날 오전 11시 공식성명을 발표한다.
“북한 침략자를 격퇴시키고 한국의 평화를 회복시키는 데
대한민국을 지지해 달라는 유엔안전보장이사회의 요청에 응하여
트르먼 대통령은 미 공군에게 군사적으로 필요하다면
북한의 어떤 군사목표에 대해서도 공격을 수행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고
한반도의 전 연안의 해상봉쇄를 명령했다.
맥아더 장군에게는 확실한 지상부대를 사용할 권한을 부여했다.”
그리고 다음날 맥아더 원수는 긴급전보로 트루먼 대통령에게
재일(在日) 제8군의 2개 사단 병력 출동을 요청하여 승낙을 받았다.
이렇듯 맥아더 원수가 아니고서는 미국의 본격적 참전이 이렇게 급진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