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욕의 삼전도비문

한강이야기 2013. 7. 15. 22:09 Posted by 조영희

 

청나라는 조선에 청나라 황제의 공덕을 찬양하는'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를
삼전도 현장에 건립할 것을 요청한다. 문제는 비문을 찬술하는 작업이다.
비변사에서는 찬술할 인물로 이경석 장유 이경전 조희일 등 네명을 인조에 극비리에 천거한다.
인조실록은 인조15년(1637) 11월 25일 기사를 살폈다.
"장유(張維)·이경전(李慶全)·조희일(趙希逸)·이경석(李景奭)에게 명하여 삼전도비(三田渡碑)의 글을 짓게 하였는데, 장유 등이 다 상소하여 사양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세 신하가 마지못하여 다 지어 바쳤는데 조희일은 고의로 글을 거칠게 만들어 채용되지 않기를 바랐고 이경전은 병 때문에 짓지 못하였으므로, 마침내 이경석의 글을 썼다."
서로 꺼리는 일이었다. 이들 가운데 이경전은 병으로 세상을 떠난다.
나머지 3명이 모두 글을 지어 인조에 올린다.
인조는 이 글쓰기에 가장 싫어하였던 이경석을 조용히 불러 간곡히 부탁한다.
중국 춘추시대의 월나라 제2대 왕인 구천(句踐)이 오나라에서 치욕을 참고 신첩 노릇을 하면서
와신상담하다가 끝내 부차(夫差) 에게 당한 치욕을 갚았다는 고사를 인용하면서  
"상제의 법칙만이 위엄과 덕을 함께 펴도다. 황제께서 동을 정벌하시니 그 군사 10만이로다.'
그는 이런 문구로 가득찬 비문을 짓고만다.
이경석나라의 존망(存亡)이 달려 있는 일이며,
후일을 도모하는 것은 나의 역할이니 오늘은 다만 문자로 저들의 비위를 맞추어
일을 더 격화되지 않도록 하는 것 뿐이다"라고 하면서 인조는 간곡하게 비문의 찬술을 부탁하였다.
이경석은 자신의 명예보다는 국가의 안위를 먼저 생각한 끝에 어려운 결단을 내리고 비문을 짖게 되었다.

인조실록은 인조16년 2월 8일
<장유와 이경석이 지어 청나라에 보낸 삼전도 비문>기사를 옮긴다.
장유(張維)와 이경석(李景奭)이 지은 삼전도 비문(三田渡碑文)을
청나라에 들여보내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택하게 하였다.
범문정(范文程) 등이 그 글을 보고, 장유가 지은 것은 인용한 것이 온당함을 잃었고
경석이 지은 글은 쓸 만하나 다만 중간에 첨가해 넣을 말이 있으니
조선에서 고쳐 지어 쓰라고 하였다.
상이 경석에게 명하여 고치게 하였다. 그 글은 다음과 같다.
“대청(大淸) 숭덕(崇德)1447) 원년1448) 겨울 12월에,
황제가 우리 나라에서 화친을 무너뜨렸다고 하여 혁연히 노해서
위무(威武)로 임해 곧바로 정벌에 나서 동쪽으로 향하니, 감히 저항하는 자가 없었다.
그 때 우리 임금은 남한 산성에 피신하여 있으면서 봄날 얼음을 밟듯이,
밤에 밝은 대낮을 기다리듯이 두려워한 지 50일이나 되었다.
동남 여러 도의 군사들이 잇따라 무너지고 서북의 군사들은 산골짜기에서 머뭇거리면서
한 발자국도 나올 수 없었으며 성 안에는 식량이 다 떨어지려 하였다.
이때를 당하여 대병이 성에 이르니, 서릿바람이 가을 낙엽을 몰아치는 듯
화로 불이 기러기 털을 사르는 듯하였다.
그러나 황제가 죽이지 않는 것으로 위무를 삼아 덕을 펴는 일을 먼저 하였다.
이에 칙서를 내려 효유하기를
‘항복하면 짐이 너를 살려주겠지만, 항복하지 않으면 죽이겠다.’ 하였다.
영아아대(英俄兒代)와 마부대(馬夫大) 같은 대장들이
황제의 명을 받들고 연달아 길에 이어졌다.
이에 우리 임금께서는 문무 여러 신하들을 모아 놓고 이르기를
‘내가 대국에 우호를 보인 지가 벌써 10년이나 되었다.
내가 혼미하여 스스로 천토(天討)를 불러 백성들이 어육이 되었으니,
그 죄는 나 한 사람에게 있는 것이다. 황제가 차마 도륙하지 못하고 이와 같이 효유하니,
내 어찌 감히 공경히 받들어 위로는 종사를 보전하고 아래로는 우리 백성들을 보전하지 않겠는가.’ 하니,대신들이 그 뜻을 도와 드디어 수십 기(騎)만 거느리고 군문에 나아가 죄를 청하였다.
황제가 이에 예로써 우대하고 은혜로써 어루만졌다.
한번 보고 마음이 통해 물품을 하사하는 은혜가 따라갔던 신하들에게까지 두루 미쳤다.
예가 끝나자 곧바로 우리 임금을 도성으로 돌아가게 했고,
즉시 남쪽으로 내려간 군사들을 소환하여 군사를 정돈해서 서쪽으로 돌아갔다.
백성들을 어루만지고 농사를 권면하니,
새처럼 흩어졌던 원근의 백성들이 모두 자기 살던 곳으로 돌아왔다.
이 어찌 큰 다행이 아니겠는가.
우리 나라가 상국에 죄를 얻은 지 이미 오래 되었다.
기미년1449) 싸움에 도원수 강홍립(姜弘立)이 명나라를 구원하러 갔다가 패하여 사로잡혔다.
그러나 태조 무황제(太祖武皇帝)께서는 홍립 등 몇 명만 억류하고 나머지는 모두 돌려보냈으니,
은혜가 그보다 큰 것이 없었다. 그런데도 우리 나라가 미혹하여 깨달을 줄 몰랐다.
정묘년1450) 에 황제가 장수에게 명하여 동쪽으로 정벌하게 하였는데,
우리 나라의 임금과 신하가 강화도로 피해 들어갔다.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하자, 황제가 윤허를 하고
형제의 나라가 되어 강토가 다시 완전해졌고, 홍립도 돌아왔다.
그 뒤로 예로써 대우하기를 변치 않아 사신의 왕래가 끊이질 않았다.
그런데 불행히도 부박한 의논이 선동하여 난의 빌미를 만들었다.
우리 나라에서 변방의 신하에게 신칙하는 말에 불손한 내용이 있었는데,
그 글이 사신의 손에 들어갔다. 그런데도 황제는 너그러이 용서하여 즉시 군사를 보내지 않았다.
그러고는 먼저 조지(詔旨)를 내려 언제 군사를 출동시키겠다고 정녕하게 반복하였는데,
귓속말로 말해 주고 면대하여 말해 주는 것보다도 더 정녕스럽게 하였다.
그런데도 끝내 화를 면치 못하였으니, 우리 나라 임금과 신하들의 죄는 더욱 피할 길이 없다.
황제가 대병으로 남한 산성을 포위하고,
또 한쪽 군사에게 명하여 강도(江都)를 먼저 함락하였다.
궁빈·왕자 및 경사(卿士)의 처자식들이 모두 포로로 잡혔다.
황제가 여러 장수들에게 명하여 소란을 피우거나 피해를 입히는 일이 없도록 하고,
종관(從官) 및 내시로 하여금 보살피게 하였다.
이윽고 크게 은전을 내려 우리 나라 임금과
신하 및 포로가 되었던 권속들이 제자리로 돌아가게 되었다.
눈·서리가 내리던 겨울이 변하여 따뜻한 봄이 되고,
만물이 시들던 가뭄이 바뀌어 때맞추어 비가 내리게 되었으며,
온 국토가 다 망했다가 다시 보존되었고,
종사가 끊어졌다가 다시 이어지게 되었다.
우리 동토 수천 리가 모두 다시 살려주는 은택을 받게 되었으니,
이는 옛날 서책에서도 드물게 보이는 바이니, 아 성대하도다!
한강 상류 삼전도(三田渡) 남쪽은 황제가 잠시 머무시던 곳으로, 단장(壇場)이 있다.
우리 임금이 공조에 명하여 단을 증축하여 높고 크게 하고,
또 돌을 깎아 비를 세워 영구히 남김으로써
황제의 공덕이 참으로 조화(造化)와 더불어 함께 흐름을 나타내었다.
이 어찌 우리 나라만이 대대로 길이 힘입을 것이겠는가.
또한 대국의 어진 명성과 무의(武誼)에 제아무리 먼 곳에 있는 자도
모두 복종하는 것이 여기에서 시작될 것이다.
돌이켜보건대, 천지처럼 큰 것을 그려내고
 일월처럼 밝은 것을 그려내는 데
그 만분의 일도 비슷하게 하지 못할 것이기에 삼가 그 대략만을 기록할 뿐이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하늘이 서리와 이슬을 내려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한다
오직 황제가 그것을 본받아
위엄과 은택을 아울러 편다
황제가 동쪽으로 정벌함에
그 군사가 십만이었다
기세는 뇌성처럼 진동하고
용감하기는 호랑이나 곰과 같았다
서쪽 변방의 군사들과
북쪽 변방의 군사들이
창을 잡고 달려 나오니
그 위령 빛나고 빛났다
황제께선 지극히 인자하시어
은혜로운 말을 내리시니
열 줄의 조서가 밝게 드리움에
엄숙하고도 온화하였다
처음에는 미욱하여 알지 못하고
스스로 재앙을 불러왔는데
황제의 밝은 명령 있음에
자다가 깬 것 같았다
우리 임금이 공손히 복종하여
서로 이끌고 귀순하니
위엄을 두려워한 것이 아니라
오직 덕에 귀의한 것이다
황제께서 가상히 여겨
은택이 흡족하고 예우가 융숭하였다
황제께서 온화한 낯으로 웃으면서
창과 방패를 거두시었다
무엇을 내려 주시었나
준마와 가벼운 갖옷이다
도성 안의 모든 사람들이
이에 노래하고 칭송하였다
우리 임금이 돌아오게 된 것은
황제께서 은혜를 내려준 덕분이며
황제께서 군사를 돌리신 것은
우리 백성을 살리려 해서이다
우리의 탕잔함을 불쌍히 여겨
우리에게 농사짓기를 권하였다
국토는 예전처럼 다시 보전되고
푸른 단은 우뚝하게 새로 섰다
앙상한 뼈에 새로 살이 오르고
시들었던 뿌리에 봄의 생기가 넘쳤다
우뚝한 돌비석을
큰 강가에 세우니
만년토록 우리 나라에
황제의 덕이 빛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