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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5.09.06 마포의 담담정
  2. 2013.07.21 한명회와 압구정 1

마포의 담담정

정자 2015. 9. 6. 07:21 Posted by 조영희

 

 담담정은 조선 초에 안평대군이 지은 정자이다.
안평대군은 이 정자에 만여 권의 책을 쌓아두고 시회(詩會)를 베풀곤 했으며
이 정자에 거둥하여 중국의 배를 구경하고 각종의 화포를 쏘는 것을 구경하였다.
이후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하고, 야인정벌에 공을 세운 영의정 신숙주의 별장이 되었다.
 이 정자 터에는 마포장이 지어져 광복 후 이승만 대통령이 잠시 머물기도 하였다.

현재 벼랑고개 위 벽산빌라 앞에는 담담정이 있던 곳이라는 표지석이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담담정은 조선 초에 안평대군이 지은 정자다.
안평대군은 이 정자에 만여 권의 책을 쌓아두고 시회(詩會)를 베풀곤 했으며
이 정자에 거둥하여 중국의 배를 구경하고 각종의 화포를 쏘는 것을 구경하였다.
이후 세종 때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하고, 야인정벌에 공을 세웠으며
네 번이나 영의정을 지낸 신숙주의 별장이 되었다.
이 정자 터에는 마포장이 지어져 광복 후 이승만 대통령이 잠시 머물기도 하였다.”

아래의 사진과 글은 '김달진미술연구소' 홈페이지의 글 '사라진 전설, 담담정 : 김석신, 담담장락'에서
그대로 옮겨온 것이다.

김정호(金正浩1804-1866)가 1861년에 제작한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를 보면 만초천(蔓草川넝쿨내)이라는 냇물이 뚜렷하다. 넝쿨내는 지금 원효대교(元曉大橋)에서 용산전자상가를 거쳐 용산역 쯤에서 한 줄기는 이태원, 목멱산(木覓山*남산)까지,
또 한 줄기는 청파로(靑坡路), 서울역, 독립문, 모악산(母岳山)까지 거슬러 오른다.
지금은 온통 시멘트로 뒤덮여 냇물이 있었는지조차 모르지만 1967년 복개공사 이전까지는 엄연한 냇가였다. 이곳에 넘쳐드는 물을 막으려 강바닥 파내는 준천(濬川)을 되풀이하던 중 1914년부터 아예 제방(堤防)을, 1967년엔 복개(覆蓋)를 하고 말았다.
이곳 서호(西湖)는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 일찍이 백제(百濟) 기루왕(己婁王재위77-111) 때 두마리 용이 나타났으므로 용산호(龍山湖)라 불렀는데 이중환(李重煥1680-1752)이 <<택리지(擇里志)>>에 쓴 것처럼 조선개국 직후 서쪽 염창(鹽倉) 모래언덕이 무너져 한강 조수(潮水)가 통하기 시작함에 팔도의 화물을 수송하는 배가 모두 용산에 정박(碇泊)하기 시작했다.
그림에 줄지어 선 선박(船舶)이 이웃 마포(麻浦)와 더불어 조선 최대의 포구(浦口) 유통기지임을 드러내고
 넝쿨내 건너 남산 아래 줄지어 선 기와집 또한 상가(商街)며 창고(倉庫)가 즐비하여 번화한 상업지대임을 알려주고 있다.저 넝쿨내가 한강 서호 또는 용산호에 섞일 즈음 바위가 치솟아 절경을 이루었으니 고려(高麗)의 왕들이 즐겨 찾던 곳이었다.
 조선(朝鮮)개국 초였을까, 위태로운 끝자리에 누각 하나 세워 읍청루(揖淸樓)요, 그윽한 안쪽에 정자 하나 세워 담담정(澹澹亭)이라 아름다움 만만치 않았다.
유본예(柳本藝1778-1842)가 <<한경지략(漢京識略)>>에 이르기를, 안평대군 이용(安平大君李瑢1418-1453)이 “담담정을 짓고 만 권의 서적을 쌓아두고 문사(文士) 들을 모아 혹 밤새도록 등불을 밝히고 담화를 하며, 혹은 배를 타고 달밤에 놀이를 했다”고 하였다.
계유정난(癸酉靖難)으로 안평대군이 살해당하자 신숙주(申叔舟1417-1475)가 이곳을 차지하였다.
서용보(徐龍輔1757-1824)와 이재학(李在學1745-1806) 일행이 어쩌면 압구정(狎鷗亭)을 거쳐 내친 김에 담담정까지 내려왔을지 모르겠다.
김석신(金碩臣1758-1816이후)도 함께 하였을 터 당연히 그 풍경 그렸을 게다.
압구정에도 일곱 사람인데 담담정에도 일곱이니 그러려니 하지만 서용보 일행이 아니면 또 어떤가.
오히려 절벽 아래 포구 옆 빨래하는 여염(閭閻) 아낙네가 정겹고 그 방망이 소리 울려 퍼져 건너편 동쪽 버드나무 더욱 흐드러진다. 뿐만 아니라 그림 속 넝쿨내는 ‘새벽 빛나는 냇물’이라 욱천(旭川)이란 이름도 갖고 있었거니와 주민들이 밤마다 불 밝히고 게 잡는 풍광이 장관을 이루었다.
<화폭 오른쪽부터 아래쪽까지 훤한 모래 들판[白沙場]인데 지금 서울역부터 용산역을 거쳐 한강철교까지 풍경이다. 탁트인 시야가 그 맑고 그윽한 즐거움 베푸는데 더없이 어울렸음에랴,
북벌(北伐)의 꿈을 키우던 효종(孝宗1619-1659*재위1649-1659)은 1655년 9월 29일 일만군병(軍兵)을 강 건너 노량진(露梁津)에 집결시켜 삼엄한 열무식(閱武式)으로 군기(軍紀)를 치켜세우기도 하였건만
1876년 개항 이래 이태원부터 용산까지 일본인이 몰려들어 조선침략의 전진기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곳 용산 백사장에서 강 건너 노량진까지 배다리[舟橋]를 놓곤 했었는데
정조(正祖1752-1800 *재위 1776-1800)는 빈번한 화성(華城*水原) 길 번거로움 줄이고자 청파동 징검다리에 주교사(舟橋司)란 관청을 설치하였다. 그 징검다리를 청파동 배다리라고 불렀거니와 1926년 무렵 없어진 이 징검다리는 숱한 화제를 낳았다.
광해(光海1575-1641 * 재위1608-1623) 시절 징검다리에서 밤마다 상서로운 빛이 솟아났다.
파내보니 현판이 나왔는데 임진왜란 때 잃어버린 숭례문(崇禮門*南大門) 현판이었다. 양녕대군 이제가 쓴 현판 글씨를 되찾았으니 왕위를 아우에게 물려주고 자유인으로 살아갔던 양녕대군을 사랑해마지 않던 숱한 민인(民人)들에겐 너무도 즐거운 이야기라 더욱이 글씨의 주인이 누구인지 밝혀둔 <<추강냉화(秋江冷話)>>의 지은이가 생육신(生六臣) 남효온(南孝溫1454-1492)이니 그 이야 끝도 가도 없이 퍼져나가 전설로 바뀌었던 게다. 문장사대가(文章四大家)로 이름 높던 이정귀(李廷龜1564-1635)가 사라져버린 담담정 터에서 옛노래 불렀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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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회와 압구정  (1) 2013.07.21

한명회와 압구정

정자 2013. 7. 21. 19:10 Posted by 조영희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74동과 72동 사이 조그만 공원이다.
중국에까지 널리 알려진 그 유명한 압구정(狎鷗亭)이 자리했던 곳이다.
조선 세조에서 성종때까지 유명한 권신이며 척신이었던 한명회(韓明澮),
그의 정자 압구정(狎鷗亭)이면서 또 그의 호 압구정(狎鷗亭)이다.
진경산수화가 겸제 정선이 그린 압구정에 관련한 두 장의 그림에서 정자를 찾아 볼 수 있다.
수려한 한강변 야트막한 언덕에 10여칸이 넘는 두 채의 한옥이 그 그림에 자태를 뽐낸다.
한강가의 풍광이 수려한 곳에 자리한 한명회의 별장 압구정은
시대를 풍미하였던 풍운아 주인 한명회만큼이나 많은 사연을 안고있다.
세조에서 성종 때까지 이어지는 그의 막강한 권세를 등에 업고 들어선 압구정이다.
그 압구정은 조선후기 철종 부마도위 박영효에게 넘어갔다.
그도 원래의 주인 한명회만큼이나 시대의 풍운가였다.
박영효가 갑신정변으로 몰락하자 압구정도 주인의 운명처럼 사라진다.

한강가 대표적인 정자 압구정은 명나라에서 이름을 지어온다.
한명회는 세조 3년 사위 예종의 세자 책봉을 받으로 명나라 사신으로 갔다.
그때 명 문신 예겸(倪謙)에게 정자의 이름과 그 기문을 지어줄 것을 부탁한다.
세종 31년 12월 명나라 경제(景帝)가 황제로 등극하였을 때다.
명은 경제의 등극을 알리려 명신 예겸을 조선에 사신으로 파견했다.
당시 세종은 몸이 아파서 누워 있었다.
세자 문종도 등창이 심하여 움직이지 못했다.
왕과 세자를 대신해서 둘째 수양군이 예겸을 맞이했다.
수양군은 신숙주 성삼문 등과 시문을 거침없이 나누던 예겸을 눈여겨 보았다.
세조는 세자 책봉 사신으로 명으로 떠나는 한명회에게
예겸을 꼭 만나고 올 것을 당부했다.
그래서 한명회는 예겸을 만났다.
한명회는 예겸을 만난 자리에서 한강가의 정자 이름을 지어줄 것을 부탁했다.
예겸은 송(宋)의 명신 한기(韓琦)가 즐겨 보내던 압구정(狎鷗亭)으로 지어준다.
한기는 서른 이전에 190만의 굶주린 사람들의 구제하였고
서하(西夏)의 오랑캐를 물리친 송의 명신이었다.
한기는 자신의 정자이름을 당대의 유명한 문장가 구양수와 함께
'압구정'이라고 지으면서 시를 보낸다.
"네가 압구정이라고 정자 이름을 지은 것을 보니
기심(機心)을 없애서 세상사람과 친하게 지내려고 하는구나!"
기심은 '조작하는 마음' '일을 꾸미는 마음'이다.
 그 일을 조작하는 마음을 없앤다면
사람에게 가까이 오지 않는 기러기와도 친하게 지낼 수 있을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니 다른 사람과는 얼마나 잘 지낼 수 있겠느냐는 말이다.
한기는 단순하게 기러기와 친하게 지내라는 뜻보다는
쿠테타로 권력을 잡은 한명회에게
기심을 버리고 정치를 잘 하라는 충고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예겸은 송의 명신 한기와 비교하여 한명회를 한껏 높여 준 것이다.
한명회는 그 정자의 이름과 그의 호도 압구정으로 정한다.
예겸의 기문이 전해지면서
명나라의 문장가들이 한명회의 압구정을 노래하는 시문을 다투어 보낸다.
조선에서도 서거정을 비롯한 많은 문인들이 압구정의 시문을 남긴다.
"임금이 하루 세 번씩 불러 총애가 흐뭇하니
정자는 있어도 와서 노는 주인이 없구나.
가슴 가운데 기심(機心)만 끊어 버린다면
비록 벼슬바다 앞에서도 갈매기와 친압(親狎)할 수 있으련만."
 최경지(崔敬止)의 압구정 시이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압구정을 노래한 대표적인 시로 꼽고 있다.


 한명회(韓明澮)는 조선전기 계유정난의 설계자로써 성공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또한 두 딸을 예종과 성종에 들이면서 왕의 장인으로서
 지략으로 당대 권력의 정점에 위치하였다.
한명회가 1487년(성종 18년) 사망한 직후
사관들이 기록한 그의 졸기 일부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권세가 매우 성하여, 따르며 아부하는 자가 많았고
손님들이 문에 가득 하였으나,
접대하기를 게을리하지 아니하여,
한 때의 재상들이 그 문에서 많이 나왔으며,
조정 관원으로서 채찍을 잡는 자까지 있었다.
성격이 번잡한 것을 좋아하고 과시하기를 기뻐하며
재물을 탐하고 색을 즐겨서
토지와 금은보화 등 뇌물이 잇달았고
집을 널리 한명회는  점유하고 어여쁜 첩들을 많이 두어
그 호사스럽고 부유함이 한 때에 떨쳤다.”
과연 그의 부와 권력을 짐작케하는 대목이다.
한명회는 세조와 운명을 같이한다.
그는 죽어서도 종묘 공신당에 세조의 공신으로 봉안된다.
세조는 불천위다.
한명회는 불천위 세조와 함께  자자손손대대로 종묘에서 제사를 받는 지위를 누린다.
세조는 세종의 世와 태조의 祖로 이루어 진 것이다.
世는 세종처럼 덕으로 조선을 다스린 성군이라는 뜻이다.
祖는 태조 이성계처럼 조선을 창업한 개국조(開國祖)라는 이야기이다.
사실 세조 이후 조선의 왕은 세조라인이다.
그는 권람의 소개로 수양군을 만난지 1년만에 계유정란으로 쿠테타를 일으킨다.
그때 정란공신 1등공신이 된다.
세조로 수양군이 왕이 될 때 좌익공신 1등공신이 된다.
또 사위 예종이 왕으로  즉위한다.
이때 남이와 강순을 제거하는 데 앞장선다.
익대공신 1등공신이 된다.
성종이 왕위에 오른다. 이때 구성군 등을 제거한다.
좌리공신 1등공신이 되는 등 4번의 1등공신이나 된다.
그 세째 딸이 예종의 부인이 되고 네째 딸은 성종의 부인이 된다.
두 명의 왕비를 배출한 척신이 한명회다.

 
한명회는 태종 16년(1415)에 청주한씨 명문에 태어났다.
그러나, 임신 7개월만에 출생해서 유모가 오래도록 밀실에서 보양하였다.
자라면서부터는 체격이 좋아지고 행동이 비범하여 많은 사람들의 주의를 끌었다.
초반에는 산수간을 방랑하는 등 그 형색이 좋지 못해서
문종 2년(1451)에 겨우 개성의 경덕궁직이로 있었다.
당시의 문신인 권람과 친해서 수양대군(세조)에게 알려지게 되고,
뒤이어 수양으로부터 '나의 자방(子房)'이라는 찬사와 신임까지 받았다.
그는 친화력과 지모와 리더십을 갖춘 인물임이 74세까지 살아가는 생애에서 곳곳에 묻어난다.
그는 의리가 대단한 인물로 평가된다.
개성에 경덕궁 말단으로 일하던 시절이다.
한양에서 간 관리들이 '송도계'를 만들어 친목을 도모한다.
한명회가 계원으로 동참하기를 요청한다.
계원들은 "경덕궁직으로 있는 사람과 자리를 함께 할 수 없다"고 거절한다.
권철영이라는 사람이 앞장서 한명회를 송도계원으로 가입시킨다.
계유정란으로 실세로 급부상한 한명회에게 송도계원들이 줄을 대기위하여 갖가지 노력을 한다.
"한명회를 송도계원으로 가입시킨 네라면
 한명회를 움직일 수 있을 텐데 너는 왜 한명회를 찾지 않느냐?"
송도계원들이 권철영을 찾아 졸라댄다.
 정작 권철영은 한명회를 찾지 않았다고 한다.
한명회는 권철영은 집으로 찾아간다.
그에게 관직을 주선해 주었다고 한다.
이때 '송도계원'이라는 말이 세간에 회자된다.
'조그만 지위나 세력을 믿고 남을 멸시하는 사람'을 풍자한 송도계원이다.
1970년대 대부분 배밭이었던 압구정 일대였다.
그 배밭에 부촌 압구정아파트촌을 형성하면서 또다른 명성을 얻는다.
'압구정문화'가 탄생한다. 오늘날 압구정문화의 뿌리 압구정이다.
압구정동이 개발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초반이었다.
압구정동 배밭과 벌판에 첫 삽을 뜬 후 불도저 소리를 내며
지형을 바꾸어 나간 건설업체는 현대건설이었다.
1970년 4월 압구정동 366~371번지 일대 4만8천여 평의 공유수면 매립공사를 시작한다.
이 후 현대아파트 23개동 1,562 가구를 건립했다.
이 지역은 경기도 시흥군 신동면과 광주군 언주면 지역이었다.
1963년 1월 신동면 지역은 영등포구로,
언주면 지역은 성동구로 편입되었다가 1975년 10월 강남구가 신설되었다.
1979년 10월 강남구에서 강동구가 나누어졌고
1988년 1월 강남구에서 서초구가 나누어졌다.
압구정동으로 대변되는 아파트 건설붐은 강남 땅투기와 '복부인'을 탄생시켰다.
1970년대 후반 부동산 경기가 과열되면서 투기가 횡행했다.
아파트 단지 주변에는 토지 투기로 돈을 벌고자 하는 부인들의 발길이 잦아졌다.
주변에선 이들을 '강남 복부인'이라 했다.
땅을 많이 가졌던 사람들이 돈방석에 앉게 되면서
'강남 졸부'란 말도 함께 생겨났다.
1980년대 후반에는 부모가 쉽게 번 돈을 헤프게 써 버리는
젊은 소비계 층이 생겨나면서 '오렌지족'이란 말도 나왔다.
상대적으로 좁은 면적에 밀집된 아파트 인구가 구매력까지 갖추다 보니 상가도 집중적으로 들어섰다.
여기에 최첨단 살롱, 까페 등이 확산되면서 압구정 일대는 유행의 첨단지역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미국의 헐리웃을 본딴 '로데오 거리'라는 이름도 생겨났다.
이는 외국 문화가 본격적으로 유입되기 시작한 당시 풍조를 잘 대변해 준다. 
압구정문화의 단면을 보여주는 '로데오 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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