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방어선전략

한강이야기 2014. 2. 5. 19:55 Posted by 조영희

1950년 6월 25일 북한이 남침을 감행했다.
국군은 계속 북한군에 밀려 개성 철원 의정부 방어선이 차례로 무너졌다.
19050년 6월 28일 새벽 미아리 방어선도 무너졌다.
국군은 극도의 혼란 속에서 철수를 시작한다.
28일과 29일 사이 한강 남안에서 철수병력의 집결을 완료할 수 있었다.
서울을 상실한 국군에게 한강은 방어에 가장 양호한 지형이었다.
이제 한강선은 국군이 적을 어떻게 방어하느냐에 따라
이 국가의 존망이 결정될 만큼 중요하게 되었다.
채병덕 총참모장은 한강을 연한 방어선에서 적의 진격을 저지하기로 결심한다.
육군참모학교장 김홍일 소장을 시흥지구전투사령관으로 임명하고 한강선 방어임무를 맡겼다.
서울이 함락되자 채병덕 육군총참모장은 6월 28일 낮 12시.
육군본부를 수원으로 이전하고 한강방어를 위한 조치를 취한다.
채 총참모장은 육군참모학교교장인 김홍일 장군을 총장실로 불러 한강방어를 요청한 것이다.
“선배님! 아군이 기사회생할 수 있는 길은 한강을 방어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김홍일 장군은 채 총참모장의 제안을 기꺼이 수락했다.
“총장님! 그동안 고생하셨습니다. 소관이 신명을 바쳐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8.15광복 당시 채병덕 총장은 일본군 소령 계급이었다.
김홍일 장군은 중국의 장개석의 신임을 받았던 중국군 소장 출신이었다.
채 총장은 김홍일 장군이 나이로도 약 20년 차이가 났기 때문에
군의 대 선배로 깍듯이 대접한 것이다.
김홍일 장군은 채 총장의 진정성이 넘치는 부탁에
승산이 없는 싸움인 줄 뻔히 알면서도 국가를 위해 그 제의를 기꺼이 받아들인다
1950년 6월 28일부터 7월 3일까지 최악의 상황과 조건이었다.
그럼에도 김홍일장군은 한강선 방어를 책임지는 시흥지구전투사령관에 임명되어
한강선 방어의 책임을 수행하게 된다.
개전 3일 후인 6월 29일 도쿄에서 극동군 사령관인 맥아더 원수가
그 상공에서 공중전이 벌어지고 있는 수원비행장에 착륙했다.
맥아더 원수는 수원비행장에까지 친히 영접을 나왔던 이승만 대통령을 만나
요담을 나눈 후 시흥지구 전투사령부 김종갑 참모장의 안내를 받아
곧장 70세 노구로 지프차를 몰아 한강방어선을 시찰하였다.
그의 방문목적은 한국전황을 직접 살펴보고 지상군 파병의 필요성을 검토하기 위함이었다.
북한군의 막강한 일방적 포격을 받고 있는 영등포의 제8연대본부에 와서
적진을 쌍안경으로 직접 관찰하기도 하였다.
개인호에서 진지를 지키고 있던 병사를 발견하고 가까이 다가가 직접 대화를 나누었다.
그 병사는 맥아더 원수의 질문에 망설임 없이 대답한다.
"직책이 무엇인가?"
"분대장입니다."
"언제가지 여기를 지킬 것인가?"
"소대장의 명령이 있을 때까지 지킬 것입니다."
"명령이 생명보다도 중요한가?"
"네. 그렇습니다."
"끝까지 명령이 없을 때는 어찌할 것인가?"
"죽을 때까지 싸우겠습니다."
"죽는 것이 두렵지 않은가?"
"두렵지 않습니다."
"음.. 알았다. 무엇인가 필요한 것은 없는가?"
"네. 우리는 지금 (M1)소총밖에 없습니다.
적의 전차와 대포를 때려잡을 수 있는 무기가 필요합니다."
"그밖에는?"
"없습니다."
"음... 내가 여기 온 보람이 있었다.
내가 돌아가서 바로 미군 자상병과 병기를 보내주겠다.
용기를 잃지 마라."
맥아더 장군은 그 병사와의 약속을 결코 저버리지 않았다.
맥아더 장군은 한강선 시찰을 마치고 김홍일 장군에게 묻는다.
“김 장군! 지금 한강방어선은 언제까지 방어할 수 있습니까?”
김홍일 장군은 자신 있게 결연한 의지로 답변했다.
“공격과 방어의 배수 원칙을 감안할 때
앞으로 열흘 정도는 지탱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현재 한강선 도처에서 한국군이 적의 보병이 도하해 오는 것을 단호하게 격퇴시키고 있습니다.
보병끼리의 전투에서 한국군이 적에 비해 단연 우세합니다.”
맥아더 장군은 김홍일 장군의 정연한 답변에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하는 듯 했다고 한다.
맥아더장군은 한강선 시찰결과 전문을 30일 새벽 3시 미 국방부에 보낸다.
“한국전선을 시찰한 결과 한국군은 붕괴되었으며
한강방어선을 고수하고 실지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미 지상군 투입이 불가피하다.”
백악군은 그날 오전 11시 공식성명을 발표한다.
“북한 침략자를 격퇴시키고 한국의 평화를 회복시키는 데
대한민국을 지지해 달라는 유엔안전보장이사회의 요청에 응하여
트르먼 대통령은 미 공군에게 군사적으로 필요하다면
북한의 어떤 군사목표에 대해서도 공격을 수행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고
한반도의 전 연안의 해상봉쇄를 명령했다.
맥아더 장군에게는 확실한 지상부대를 사용할 권한을 부여했다.”
그리고 다음날 맥아더 원수는 긴급전보로 트루먼 대통령에게
재일(在日) 제8군의 2개 사단 병력 출동을 요청하여 승낙을 받았다.
맥아더 원수가 아니고서는 미국의 본격적 참전이
이렇게 급진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1950년 6월 28일 오전 2시 30분 한강 인도교와 철교가 폭파됨으로써
한강 이북의 수도 서울은 완전히 북괴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아군은 한강이라는 자연적인 장애물을 이용하여
저지선을 구축하고 북괴군의 도하를 막게 되었다.
김홍일 사령관은 유재흥 준장을 제7사단장에 임명하여 노량진 방면에 배치했다.
이종찬대령을 수도사단장으로 임명과 동시에 영등포 방면에 포진케 하였다.
한강 저지선의 서쪽에서는 김포지구 전투사령부가 김포 비행장과 오류동 일대에서
북괴군의 진출을 억제하며 측면 지원을 하고 있었다.
서울을 점령한 북괴군은 제3사단 제4사단 제105 전차여단에게
 ‘서울사단’이라는 칭호를 부여하는 등 기세가 등등했다.
미군을 포함한 국제연합군이 내원하기 전에 국군의 주력 부대를 섬멸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6월 29일 밤부터 북괴군은 한강 도하작전을 시작하였다.
북괴 제3사단은 30일 새벽에 서빙고에서 도하하여
동작동과 흑석동을 잇는 고지로 진출을 시도하였다.
그들의 계획은 노량진 부근의 고지대를 장악하여
그 엄호 아래 폭파에 실패한 한강철교를 이용하여 전차를 도하시키려는 것이었다.
여기에서는 북괴군이 전차의 지원을 받지 못한다는 사실에
고무된 우리 국군은 대등한 조건 속에서 북괴군 제3사단을 공격하여
커다란 타격을 가하면서 7월 3일까지 그들이 한강을 건너지 못하도록 저지하였다.
영등포 방면에서는 국군 제8연대와 제18연대의 일부 병력이
6월 27일부터 7월 3일까지 수차례에 걸쳐 북괴군의 공격을 격퇴하면서 여의도를 확보하고 있었다.
북괴군은 불완전하게 파괴된 한강의 복선철교를 수리한다.
마침내 7월 3일을 기하여 전차를 도하시키고 이를 앞세워 영등포 방면으로 진출하기 시작한다.
국군의 한강 저지선은 붕괴되고 서울은 완전히 공산군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었다.
김홍일장군의 시흥지구전투사령부는 한강방어선을 6일동안이나 지켜냄으로써
국군이 전열을 정비할 수 있었다.
미국이 한국전에 참전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얻어내는 기대이상의 큰 성과를 거둔다.


서울 흑석동은 한강가에 있는 마을이다.
면적 1.68㎢, 인구 4만 2268명 서울특별시 동작구에 속한 동이다.
한강대교와 동작대교 사이의 남쪽에 있다.
동·서·남쪽의 3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북쪽은 한강에 닿아 있다.
동쪽은 동작동, 서쪽은 본동, 남쪽은 상도동과 접해 있는 흑석동이다.
흑석1동사무소 남쪽 일대에서 나오는 돌이 검은색을 띠므로
검은돌(黑石)마을이라 한 데에서 유래한 흑석동이다.
지금의 흑석1동 232, 243번지(12·14·16·17통) 일대를 지칭했다.
은로초등학교 자리에는 동사무소가 있었다.
또한 남부동에는 우리 전통 한옥 120여채가 지금도 밀집되어 있어
 일명 한옥촌이라고도 부른다.
지금의 흑석동 232번지와 243번지 일대에 검은색 돌이 나온다고 하여
지명을 '검은돌' 이라고 했다.이것을 한자로 바꿔 흑석(黑石)이라고 칭했다.
흑석동은 조선시대 말까지 경기도 과천군 하북면 흑석리였다.
1914년 3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111호와 동년 4월 1일
경기도령 제3호에 의한 경기도 구역획정 때 시흥군 북면 흑석리로 칭하였다.
그 후 1936년 4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8호로 경성부에 편입되어 흑석정이 되었다.
1943년 6월 10일 조선총독부령 제163호로 구제도(區制度)를 실시하면서 영등포구 흑석정이 되었다.
광복 후 1946년 10월 1일 일제식 동명을 우리 동명으로 바꿀 때 흑석동이 되었다.
그후 1973년 7월 1일 대통령령 제6548호로 영등포구에서 관악구를
분리 신설할 때 관악구에 이속되었다.
1980년 4월 1일 대통령령 제9630호로 관악구에서 동작구를 분구하면서
흑석동은 동작구에 속하여 오늘에 이른다.
검은돌시장
흑석2동 9, 43번지 일대에 있던 시장이다.
이 시장은 주로 야채류, 과일류 등 각종 농산물이 거래되었다.
 광복 직후 길거리에서 안쪽으로 밀려 지금의 흑석3동에 있는 흑석시장 자리에 정착하게 된 것이다.
검은돌시장은 당시 서초동·양지동, 과천지방 사람들이 많이 이용하였다고 한다.
범바위
흑석2동 시민아파트가 있었던 아래쪽 한강변에 있었던 바위이다.
옛날 이곳에는 많은 낚시꾼들이 모여들어 고기잡이를 하였다 한다.
어느날 한 낚시꾼이 커다란 잉어 한 마리를 낚자
갑자기 눈보라와 모래가 휘날려 눈 앞이 보이지 않았다.
이상히 여긴 나머지 뒤를 돌아다보니 커다란 호랑이가 나타나
어슬렁거리며 앞발을 내미는 것이었다.
낚시꾼이 질겁을 하고 도망을 치자 호랑이도 그 뒤를 쫓아왔다.
낚시꾼이 더 이상 도망을 가지 못하고 마침 그곳에 구멍이 뚫린 큰 바위 속으로 들어갔더니
호랑이가 들어오지 못하고 밖에서 두리번거리고만 있었다.
그러자 그는 그 바위 속에 갇혀서 나오지도 못하고 결국 죽었다.한다.
이 호랑이가 앞발짓을 한 것은 잉어를 달라는 뜻이었다.
 낚시꾼은 자기를 잡아 먹으려고 하는 줄 알고 결국 죽음을 당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 오고 있다.
공동묘지
흑석시장 입구에서 중대부고로 가는 길 양쪽과 골짜기에 공동묘지가 있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에는 옛날 본동·노량진동·상도동,
그리고 흑석동 주민들이 세상을 떠나면 이곳에 묘를 썼다 한다.
그러나 이 지역이 서울시로 편입되면서 묘지 사용이 금지되었다.
 서울시가 기존 묘도 이장하도록 공고한 후
이 지역을 개인에게 불하하여 지금의 주택들이 들어서게 되었다.
서달산
흑석동 남서쪽 달마사(흑석1동 37번지)가 있는 뒷산으로 돌이 많이 나왔다고 한다.
 달마산
달마사라는 절이 있는 산 이름이다.
집박굴우물
달마사 밑에서 나던 맑은 물로 약수는 아니지만 물맛이 썩 좋았다고 한다.
대동우물
흑석1동 156번지 지금의 성모병원 자리에 있던 우물이다.
 옛부터 동리주민 약 80여호가 사용하였던 큰 우물이었으나
병원이 들어서면서 메꾸어졌다.
대머리산
흑석2동 26번지 일대로 지금의 벧엘교회 옆 동산을 말한다.
이 산의 꼭대기 부분에 나무가 하나도 없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도당째
학도의용군 현충비가 세워진 위에는 큰 바위가 있었다.
바위 사이에 아름드리 소나무가 한 그루 서 있었다.
전에 마을 주민들은 이곳에 칠성님을 모시는 도당을 만들어
일년에 봄, 가을 두 번씩 마을에 풍년이 들기를 기원하고,
질병이 없기를 비는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일명 도당칠성이라고도 하였다.

명수대
서달산 꼭대기에 있었던 건축물이다.
1920년 일본인 부호 목하영(木下榮)이란 사람이
이곳에 별장을 짓고 놀이터를 만들었다고 한다.
맑은 한강물이 유유히 흐르는 경치 좋은 곳이라 하여
명수대란 이름을 붙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광복 후 이 건물을 철거되었다.

명창굴
흑석1동에서 상도동으로 넘어가는 중앙대학교 중문 부근의
마을 이름으로 지금도 오래된 한옥이 있다.
옛날 이 마을 앞으로 조그마한 개천이 흘렀다고 한다.
 
비개마을
흑석2동 26·28·33·38번지 일대로 한강변 기슭에 비스듬히 비껴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현재 버스정류장 이름으로도 유명하다.

찬우물
비개마을 부근 산버덩에 있었던 우물로 물이 매우 차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솔밭
흑석 3동 7, 8통 일대 지역에 있었던 마을로
옛날 이곳에 소나무가 많이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안말·새말
안말은 흑석1동 5통(125-133번지)일대의 마을을 일컫는다.
새마을의 유래는 을축년 큰 장마 때 안말이 침수되자
그곳 주민들이 좀 더 높은 지대이던 지금의 중앙대학교 앞으로
 옮겨서 새로 집을 짓고 살게 되면서 생긴 것이다.
그리고 흑석1동 156번지 성모병원이 들어선 지역의 마을을 웃말이라고 칭했다.

약수동
흑석3동 69번지 6통 일대의 마을로 옛날 이곳에서
아주 맛있는 약수물이 나왔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연못께
연못시장(흑석동 101·102·182번지)과 주택은행이 있는 일대에 연못이 있었다고 한다.
이 연못은 일제 때 일본인 목하영(木下榮)이 이 곳에 5천평 정도의 커다란 연못을 파고
가운데 나무를 심어 섬을 만들어 놓은 까닭에 동리 사람들의 휴식처와 낚시터로도 이용되었다고 한다.
광복후에 이곳을 메꾸고 시장이 생기자 연못자리에 있는 시장이라 하여 연못시장이라고 불리어지게 되었다.

완성군산
완성군산(일명 왕성군산)은 전주이씨 덕천군파 완성군의 묘소가 있는 산으로,
흑석2동 54-323호에 양옥으로 된 재실(齋室)이 있으며
후손이 이재주(李在周)가 20년 전부터 이곳을 관리하고 있다.
이 산을 왕성군산으로 칭하는 것은 완성군의 묘소가 있기 때문인데, 이를 잘못 발음하여 불려진 것이다.

재강굴산
붉은 산이란 데서 붙여진 이름으로 중앙대학교 뒷산을 일컫는데,
중앙대학교를 설립한 임영신의 묘가 있다.


 

한강의 발원지 검룡소를 찾아서

한강이야기 2013. 8. 21. 20:17 Posted by 조영희

 

강원도 태백은 백두대간의 분수령을 끼고 있다. 가히 강의 고향이라고 할만한  태백이다.
백두대간 금대봉(1,418m) 기슭의 검룡소(儉龍沼)는 한반도의 젖줄인 한강의 발원지이다.
태백시내 한복판에 자리한 황지(黃池)는 영남 땅을 적시며 흐르는 낙동강의 발원 연못으로 유명하다.
이웃 삼수령 정상 휴식터에 있는 삼수정 앞 상징탑에서 삼수령의 글을 아래에 옮긴다.
"하늘이 열리고 우주가 재편된 아득한 옛날
옥황상제의 명(命)으로 빗물 한가족이 대지(大地)로 내려와
아름답고 행복하게 살겠노라고 굳게 약속을 하고
하늘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이 빗물 한가족은 한반도의 등마루인 이곳 삼수령(三水嶺)으로 내려오면서
아빠는 낙동강으로
엄마는 한강으로
아들은 오십천강으로 헤어지는 운명이 되었다.
한반도 그 어느 곳에 내려도 행복했으리라
이곳에서 헤어져 바다에 가서나 만날 수밖에 없는
빗물 가족의 기구한 운명을
이곳 삼수령만이 전해주고 있다."
 

검룡소에는 두 개의 탐방안내소가 있다.
생태환경을 설명하는 봉사자와 문화해설을 하는 문화관광해설가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그곳에서 탐방객의 인적사항을 기록하고 신비한  1.3km의 숲 길로 들어선다.
그 입구부터가 천연의 자원이 신비스럽게 전개된다.
정부는 검룡소 일대를 명승지로 지정하여 환경을 보호하고 있다.


 
나무로 만든 다리 세심교(洗心橋)가 세상을 둘로 가른다.
다리를 건느면서 지금까지 안고 있던 근심 걱정을 다 내려놓으라고 한다.
맑은 시내물에 말끔히 씻고 다리를 건너 정(淨)한 마음으로 검룡의 세상을 만나라라고 한다.
 

검룡소 들어가는 신비의 길이다.
길 양쪽에 이깔나무 빼곡한 운치가 넘치는 산길이다.
검룡소에서 흐르는 물의 방향으로 왼쪽으로는 참나무 숲을 이루고
오른쪽으로 30~40년 전후로 식재한 것으로 보이는 낙엽송(이깔나무)으로 숲을 이룬다.
숲 속에는 식용 또 약용으로 이용하는 얼러지가 홍자색으로 앙증맞게 꽃을 피우며
어떤 새인지 보이지는 않지만 산새의 울음소리가 들려 인적 드문 계곡의 정적을 깨기도 한다.

검룡소의 안내판이다. 검룡소는 한강의 발원지로 창죽동 금대봉골에 위치해 있다.
전설에 의하면 서해에 살던 이무기가 용이 되기 위해 한강 상류를 향해 거슬러 오르다가
검룡소에 이르러 자리를 잡고 살았다. 소들이 풀을 뜯어 먹으로 오면 잡아먹었다.                               
동네 주민들은 이 검룡소를 메워버렸다.이무기는 결국 용이 되지 못했다고 한다.
검룡소는 1980년대에 복구되었다.
처음에는 금태봉 자락에 있다고 해서 금용소(金龍沼)라고 했다.
점차 마을주민 사이에서 억양상 ‘금’의 발음이 ‘검’으로 읽혀갔다.
그래서 아예 금(金)자 대신 ‘검(儉)’자로 변경키로 했다.
민족의 시조인 단군 왕검(王儉)의 ‘검(儉)’을 인용해 검용소(儉龍沼)로 변경한 것이다.
지명의 변경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어법상 ‘용’(龍)을 ‘룡’으로 표기해야 한다는 지적에 따라 비로소
현재의 상용단어인 검룡소(儉龍沼)를 완성하게 됐다.
한강의 발원지는 평창 오대산 우통수로 알려졌다.
세종실록 지리지에서 우통수 기사를 옮겨서 살핀다.
"명산(名山)은 오대(五臺)이다.부(府) 서쪽에 있다.
봉우리 5가 고리처럼 벌려 섰는데, 크기와 작기가 고른 까닭에 오대산이라 한다.
서대(西臺) 아래 수정암(水精庵) 옆에서 우리샘[檻泉]이 솟아나는데,
〈물의〉 빛과 맛이 여느 물과 다르고,
그 무게도 또한 그러하므로 우통수(于筒水)라고 하며,
곧 금강연(金剛淵)은 한강물[漢水]의 근원이 된다.
봄·가을에 그 고을 관원으로 하여금 제사지내게 한다.
한강물이 비록 여러 곳의 물을 받아 흐르나,
우통수가 중심이 되어 빛과 맛이 변하지 아니해서
중국의 양자강(揚子江)과 같으므로, 한(漢)이란 이름이 이로 인하여 되었다.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 바다 어귀에 이르기 8리, 남쪽으로 삼척에 이르기 70리,
서쪽으로 횡성(橫城)에 이르기 1백 55리, 북쪽으로 양양(襄陽)에 이르기 46리이다."


태백의 광명정기 예솟아(여기서 솟아) 민족의 젓줄 한강을 발원하다.
이 비문처럼 한강의 발원지임으로 밝혀내는데는 태백 향토인들의 노력이 컸다고 한다.
김강산 전 태백문화원장이 1984년 어느날 창죽천 금대봉 기슭에서 석회암반을 뚫고
끈임없이 분출하는 물줄기를 목격한다.
김 소장은 그 날 우연히 5만분의 1 지도를 통해 당시까지 한강의 발원지로 알려진
오대산 우통수와 창죽천의 물이 합수되는 정선군 나전리를 기준으로 강물길이를 도상실측했다.
뜻밖에도 우통수가 약 53㎞, 창죽천이 약 85㎞에 달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창죽천이 우통수 보다 32㎞나 긴 하천으로,
금대봉 기슭에서 흘러나온 물줄기가 한강발원지라는 계산이었다.
안창죽 금대봉 기슭에서는 작은 샘물이 다섯 곳이상 발견됐지만 모두 창죽천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땅 속으로 스며들어 그 흔적을 알 수 없었다.
이는 태백지역 지질 특성상 석회 암반의 지하공동으로 유입되어 물구덩이로 솟아나기 때문이다.
물줄기가 가뭄시기에도 변함없이 솟아나는 최상류 지점이 바로 오늘날의 ‘검룡소’로 지정된 것이다.

 

태백시 창죽동 금대봉 기슭 검룡소와 그 일대 계곡은 특이하고
아름다운 지형 지질학적 경관을 이루고 희귀한 동식물상이 있다.
검룡소와 관련된 전설이 담겨 있는 역사 문화 경승지이다.
검룡소는 석회암반을 뚫고 하루 2천 톤 가량의 지하수가 솟아나오는 냉천(冷泉)으로
사계절 9℃ 정도의 수온을 유지하고, 20m 이상 계단상 폭포를 이루고 있다.
오랜 세월 흐른 물줄기로 인해 깊이 1~1.5m, 폭 1~2m의 암반이 푹 파여서
그곳으로 물이 흐르는데 용트림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검룡소는 둘레 20여m에 깊이를 알수 없다. 
석회암반을 뚫고 지하수가 하루 2-3천톤가량 솟아난다.
이 곳 물의 온도는 늘 9도를 유지하고 있다.
물이 솟아나는 구멍에 큰 돌이 놓여 있다.
큰 태풍 때 돌이 굴러와 용출구를 막고 앉았다고 전한다.
물 속에는 동전이 곳곳에 보인다.
환경보전을 위해 동전을 던지지 말 것을 호소하고 있다.
일부 탐방객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동전을 던진다.
검룡소에서 '복'이 쏟아질 것을 갈구하면서 말이다.


 





 

 

호머 헐버트의 문경새재아리랑

한강이야기 2013. 8. 16. 10:20 Posted by 조영희

 

"문경새재 물박달나무/ 홍두깨 방망이로 다 나간다/ …/
홍두깨 방망이 팔자 좋아/ 큰아기 손질에 놀아난다…."
경북 문경에서 수안보 쪽으로 문경새재를 넘다 보면
길 왼편에 '문경새재 아리랑 비(碑)'가 서 있다.
대한제국 첫 번째 왕 고종의 특사로 활동한 미국인 호머 헐버트(1863~1949)가
 1896년 최초로 서양식 악보로 채록해 외국에 소개한 구전 ‘문경새재 아리랑’이다.
지난 13일 문경새재 입구에 있는 옛길박물관에서
헐버트의 한국 사랑과 아리랑 사랑을 기념하는
‘문경새재아리랑비’ 제막식이 열렸다.
가로 3m, 세로 2m의 크기의 아리랑비에는 40대 모습의 헐버트 초상화가 새겨졌다.
 1896년 헐버트가 직접 아리랑을 영어로 쓴 ‘Korean Vocal Music(한국인의 소리)’
이라는 제목의 서양 악보도 그대로 옮겨졌다.
뒷면엔 ‘헐버트를 기억하고자 기념비를 세운다’는 말도 담았다.

아리랑은 지금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 됐다.
100년 전만 해도 아리랑을 아는 세계인은 거의 없었다.
민초들 입에서 입으로 전해 온 아리랑을
서양식 악보로 처음 정리한 사람이 호머 B 헐버트였다.
문경아리랑은 헐버트가 최초로 채보(採譜)한 아리랑이다. 그는 1896년 아리랑을 세계에 알리는 논문을 쓰며
"아리랑은 한국인들에게 쌀과 같은 것"이라고 했다.
쌀이 한국인의 육신을 지켜줬듯 한국인들은
아리랑을 통해 역사의 애환을 버텨왔다는 뜻이다.
헐버트는 아리랑을 가사도 박자도 제각기 여러 가지로
부르는 한국인들을 두고 '즉흥곡의 명수'라고 했다.
미국인 헐버트는 1886년 스물셋에 이 땅에 왔다.
성(姓)의 음을 따 우리 이름을 할보(轄甫)라고 지었다.
교육자, 의사, 선교사, 언론인, 역사학자, 언어학자, 체육인, 독립운동가…. 헐버트가 한국에 젊음을 바쳐 얻은 호칭은 그렇게나 많았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말이 있다.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사랑한 사람.'
그는 3남2녀를 한국에서 낳았고
그중 딸 하나, 아들 하나를 한국에서 잃었다.
1907년 일제의 핍박을 받아 쫓겨났던 헐버트가
 다시 한국을 찾은 것은 1949년 여든여섯일 때였다.
이승만 대통령이 8·15 광복절 기념식에 그를 초청했다.
 나라 형편이 좋지 않아 비행기 표도 보낼 수 없었다.
그는 쇠약한 몸으로 미군 군용선을 타고 태평양을 건넜다.
AP 기자가 42년 만에 한국 가는 소감을 묻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오랜 소원이었다.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한다."
그리고 한국 땅에 발 디딘 지 일주일 만에 광복절과 건국 기념행사도 보지 못하고 숨을 거뒀다.
문경새재아리랑비의 건립취지문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1896년 2월 고종의 외무특사였던 호머 베자릴 헐버트 박사에 의해 발행된
영문잡지『조선유기』에 우리의 아리랑이 서양악보로 처음 기록되었다.
 여기에 '문경새재 박달나무 홍두깨 방망이로 다나가네'
의 가사가 있어 우리나라 아리랑 기록상 그 첫 시원을 알려주고 있다.
문경새재는 모든 아리랑의 고개 대명사로 알려져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수많은 사람들의 삶속에 눈물과 애환, 희망과 미래가 녹여져 있는 공간이다.
이에 문경새재 고개에 깃든 아리랑의 역사와 헐버트 박사를 기억하고자 이 기념비를 세운다.
 이천십삼년 팔월 십오일
글 문경시장 고윤환 글씨 한국서학회 명예회장 이 곤"

 

 

1950년 6월 25일 북한이 남침을 감행했다.
국군은 계속 북한군에 밀려 개성 철원 의정부 방어선이 차례로 무너졌다.
19050년 6월 28일 새벽 미아리 방어선이 무너졌다.
국군은 극도의 혼란 속에서 철수를 시작한다.
28일과 29일 사이 한강 남안에서 철수병력의 집결을 완료할 수 있었다.
서울을 상실한 국군에게 한강은 방어에 가장 양호한 지형이었다.
이제 한강선은 국군이 적을 어떻게 방어하느냐에 따라 국가의 존망이 결정될 만큼 중요하게 되었다.
채병덕 총참모장은 한강을 연한 방어선에서 적의 진격을 저지하기로 결심하고
육군참모학교장 김홍일 소장을 시흥지구전투사령관으로 임명하고 한강선 방어임무를 부여하게 된다.
서울이 함락되자 채병덕 육군총참모장은 6월 28일 낮 12시
육군본부를 수원으로 이전하고 한강방어를 위한 조치를 취한다.
먼저 채 총참모장은 육군참모학교교장인 김홍일 장군을 총장실로 불러 한강방어를 요청한 것이다.
“선배님! 아군이 기사회생할 수 있는 길은 한강을 방어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김홍일 장군은 채 총참모장의 제안을 기꺼이 수락했다.
“총장님! 그동안 고생하셨습니다. 소관이 신명을 바쳐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8.15광복 당시 채병덕 총장은 일본군 소령 계급이었다.
김홍일 장군은 중국의 장개석의 신임을 받았던 중국군 소장 출신이었다.
채 총장은 김홍일 장군이 나이로도 약 20년 차이가 났기 때문에
군의 대 선배로 깍듯이 대접한 것이다.
김홍일 장군은 채 총장의 진정성이 넘치는 부탁에
승산이 없는 싸움인 줄 뻔히 알면서도 국가를 위해 그 제의를 기꺼이 받아들인다
 김홍일 장군은 한강선 방어를 책임지는 시흥지구전투사령관에 임명되어
1950년 6월 28일부터 7월 3일까지 최악의 상황과 조건아래서 한강선 방어의 책임을 수행하게 된다.
개전 3일 후인 6월 29일 도쿄에서 극동군 사령관인 맥아더 원수가
그 상공에서 공중전이 벌어지고 있는 수원비행장에 착륙했다.
맥아더 원수는 수원비행장에까지 친히 영접을 나왔던 이승만 대통령을 만나
요담을 나눈 후 시흥지구 전투사령부 김종갑 참모장의 안내를 받아
곧장 70세 노구로 지프차를 몰아 한강방어선을 시찰하였다.
그의 방문목적은 한국전황을 직접 살펴보고 지상군 파병의 필요성을 검토하기 위함이었다.
북한군의 막강한 일방적 포격을 받고 있는 영등포의 제8연대본부에 와서
적진을 쌍안경으로 직접 관찰하기도 하였다.
개인호에서 진지를 지키고 있던 병사를 발견하고 가까이 다가가 직접 대화를 나누었다.
그 병사는 맥아더 원수의 질문에 망설임 없이 대답한다.
"직책이 무엇인가?"
"분대장입니다."
"언제가지 여기를 지킬 것인가?"
"소대장의 명령이 있을 때까지 지킬 것입니다."
"명령이 생명보다도 중요한가?"
"네. 그렇습니다."
"끝까지 명령이 없을 때는 어찌할 것인가?"
"죽을 때까지 싸우겠습니다."
"죽는 것이 두렵지 않은가?"
"두렵지 않습니다."
"음.. 알았다. 무엇인가 필요한 것은 없는가?"
"네. 우리는 지금 (M1)소총밖에 없습니다.
적의 전차와 대포를 때려잡을 수 있는 무기가 필요합니다."
"그밖에는?"
"없습니다."
"음... 내가 여기 온 보람이 있었다.
내가 돌아가서 바로 미군 자상병과 병기를 보내주겠다.
용기를 잃지 마라."
맥아더 장군은 그 병사와의 약속을 결코 저버리지 않았다.
맥아더 장군은 한강선 시찰을 마치고 김홍일 장군에게 묻는다.
“김 장군! 지금 한강방어선은 언제까지 방어할 수 있습니까?”
김홍일 장군은 자신 있게 결연한 의지로 답변했다.
“공격과 방어의 배수 원칙을 감안할 때
앞으로 열흘 정도는 지탱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현재 한강선 도처에서 한국군이 적의 보병이 도하해 오는 것을 단호하게 격퇴시키고 있습니다.
보병끼리의 전투에서 한국군이 적에 비해 단연 우세합니다.”
맥아더 장군은 김홍일 장군의 정연한 답변에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하는 듯 했다고 한다.
맥아더장군은 한강선 시찰결과 전문을 30일 새벽 3시 미 국방부에 보낸다.
“한국전선을 시찰한 결과 한국군은 붕괴되었으며
한강방어선을 고수하고 실지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미 지상군 투입이 불가피하다.”
백악군은 그날 오전 11시 공식성명을 발표한다.
“북한 침략자를 격퇴시키고 한국의 평화를 회복시키는 데
대한민국을 지지해 달라는 유엔안전보장이사회의 요청에 응하여
트르먼 대통령은 미 공군에게 군사적으로 필요하다면
북한의 어떤 군사목표에 대해서도 공격을 수행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고
한반도의 전 연안의 해상봉쇄를 명령했다.
맥아더 장군에게는 확실한 지상부대를 사용할 권한을 부여했다.”
그리고 다음날 맥아더 원수는 긴급전보로 트루먼 대통령에게
재일(在日) 제8군의 2개 사단 병력 출동을 요청하여 승낙을 받았다.
이렇듯 맥아더 원수가 아니고서는 미국의 본격적 참전이 이렇게 급진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초대 미 8군사령관을 지낸 월턴 워커 장군(오른쪽).
왼쪽은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7월 워커 장군(앞쪽 군모를 쓴 사람)이
미군 장교들과 지도를 보면서 작전회의를 하는 모습. [중앙포토]
올해 제정된 ‘백선엽 한·미 동맹상(賞)’(이하 동맹상) 수상자로
초대 미 8군사령관을 역임한 월턴 워커(Walton H. Walker) 장군이 선정됐다고 국방부가 28일 발표했다.
국방부가 주관하고 중앙일보가 후원하는 동맹상은 한·미 동맹과 한국군 발전에 기여한 미국인을 대상으로
1년에 한 차례 시상하게 되며 첫 시상식은 9월 30일 ‘한·미동맹의 밤’ 행사에서 열린다.
국방부 당국자는 “한·미 양국의 군사동맹이 60주년을 맞았음에도
미국 측 인사에 대한 보상프로그램이 없다는 인식에 따라 상을 제정하게 됐다”며
 “지난 24일 심사위원회를 열어 워커 장군을 수상자로 선정했다”고 말했다.
시상식에는 워커 장군의 손자인 월턴 워커 2세가 참석할 예정이다.
심사위원회는 김재창 예비역 대장을 위원장으로 권오성(육군 대장) 연합사령부 부사령관
등 현역 한·미 고위 장성과 임관빈 국방부 정책실장, 김종혁 중앙일보 편집국장,
박인휘 이화여대(국제학부) 교수, 김중근 전 외교통상부 통상교섭조정관,
구본학 한림대 부총장 등으로 구성됐다.
이들은 24일 1시간50분에 걸친 토론과 투표를 거쳐 워커 장군을 선정했다.
국방부 당국자는 “워커 장군이 6·25전쟁 당시 우리나라 방위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대한민국을 지켜낸 점이 높게 평가됐다”며 “특히 낙동강 전투에서 우리나라를 지켜내는 등
혁혁한 전공과 함께 우리 군과 미군의 칭송을 받고 있는 인물이어서 초대 수상자로 적임자”라고 설명했다.
1889년 12월 3일 텍사스주 벨튼에서 출생한 그는 1912년 미국 웨스트포인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제1, 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3기갑사단장으로 참전해 승리를 거듭했으며,
특히 북아프리카 전투에서 독일군의 로멜 부대와 맞서 공훈을 세우고 중장으로 승진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영웅인 조지 패튼 장군이 가장 아꼈던 부하로 평가받았으며
‘패튼 장군의 불독’이란 별명을 얻었다.
그는 이후 48년 맥아더 장군의 부름을 받아 일본에 본부를 둔 미 8군 초대 사령관으로 부임했다.
그러다 50년 6·25전쟁이 터지자 7월 13일 낙동강 지역에 파견돼
“버티느냐 죽느냐(Stand or Die)”라며 방어선 사수 명령을 내렸다.
그는 “내가 여기서 죽더라도 끝까지 한국을 지키겠다.
철수건 전선 조정이건 어떤 것이든 뒤로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라고도 했다.
포항·영천·대구·창녕·마산·통영을 연결하는 이른바 ‘워커라인’의 방어작전은
국군과 연합군 간 최초의 연합작전이었으며 한·미 군사동맹의 시초가 됐다.
하지만 그는 6·25에 참전했던 아들 샘 워커(예비역 대장) 대위의 은성 무공훈장 수훈을 축하하기 위해
50년 12월 23일 행사장으로 가던 중 서울 도봉구 도봉동 인근에서 차량이 전복돼 숨졌다.
당시 미국 지도자들은 “워커 장군이 살아있었다면 전쟁의 양상이 달라졌을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
아들 샘 워커(88세)는 고령으로 장거리 여행이 힘들어 손자가 대신 시상식에 참석하게 됐다.
우리 정부는 워커 장군을 기려 61년 광진구 아차산 자락에
유엔군의 휴양시설을 만들며 워커힐로 명명했다.
주한미군과 유엔군이 일본이나 동남아로 휴가를 가지 않고 휴식을 취하도록
63년 완공된 워커힐은 73년 선경개발(현 SK)에 넘어가며 워커힐호텔로 바뀌었다.
정용수 기자
정용수 기자 [nkys@joongang.co.kr]
-7월 29일자 중앙일보기사를 옮겨온 것이다.-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운중동 한국학중앙연구원을 끼고 의왕으로 가는 옛길을 따라가면
청계산 자락  길가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석운동 산 16~18번지 경기도 기념물 제84호 이경석선생묘를 만난다. 묘역 입구에는 신도비 2기가 나란히 세워져 있다.
하나는 1754년에 세워진 원래의 비이다. 글자가 모두 깍여 보이지 않는다.
땅 속에 훼손당한채 300년동이나 묻혀 있던 비다.현재는 마모가 심하여 판독이 불가능하다.
후손들이 땅속에서 파내어 다시 세운 원래의 비다.원래의 비문을 다시 새겨 세운 새로운 신도비다.

 

원래 이경석의 신도비의 비문은 서계 박세당이 짓는다.
"노성인(老成人)의 귀중함이 이와 같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 노성인을 모욕하는 자가 있다면 천하의 불상(不祥)함이 막대하도다.
불상한 짓을 감히 한다면 또한 반드시 불상한 응보가 따를 것이다.
이것은 하늘의 도이니, 어찌 두려운 일이 아니겠는가?"
그는 우암 송시열을 노성인(老成人)을 모욕한 불상한 무리로 규정한다.
당시 사림의 영수 송시열을 준열하게 비판한다.
그는 인조를 대신해서 신하로서 삼전도비문 찬술이 부득이했음을 강조하여 이경석을 두둔했다.
마지막으로 송시열에 대해 한마디 말을 더 추가했으니,
그것은 바로 은의를 저버린 배은자(背恩者)라는 표현이었다.
그는『서계집』권22, 「영의정백헌이공신도비명(領議政白獻李公神道碑銘)」)에서
결국 박세당은 이경석을 군자로 칭송한 반면 송시열을 소인(小人),
불선자(不善者)로 단정함으로서 이듬해에 큰 화를 초래하게 된다.
그는 비명(碑銘) 마지막에 송시열에게 올빼미를,
이경석에게 봉황을 비유하면서 이경석을 군자라고 칭송했다.
"올빼미는 봉황과 성질이 판이한지라 /성내기도 하고 꾸짖기도 하였네/    
착하지 않은 자는 미워할 뿐 /군자(君子)가 어찌 이를 상관하랴  /     
나의 명문(명문)을 빗돌에 새기노니/ 사람들이여 와서 공경할지어다."
노론은 박세당이 송시열을 모욕하였다며 분노하였다.
 1703년 봄에 성균관 유생들은 박세당을 배척하는 상소(上疏)를 올렸다.
 유생의 배후에는 박세당을 제거하려는 김창협, 김창흡 등 노론(老論)의 핵심부가 있었다.
 그는 당시 송시열계 당인들의 감정을 자극하게 되어 삭탈관직을 당하고 유배를 떠나게 된다.
이경석의 신도비는 50여년 뒤인 영조 30년(1754) 이광사의 글씨를 받아 겨우 세웠다.
송시열을 따르는 노론쪽에서 신도비를 깍아내 훼손했다고 전해지는 그의 신도비다.

 

 

 

영중추부사 이경석(李景奭)이 죽었다. 사신은 논한다.
이경석은 집에서 효도하고 우애로웠으며 조정에서 청렴하고 검소하였다.
일찍부터 문망(文望)을 지녔었는데 드디어 정승에 올랐다.
나라를 근심하는 마음은 늙도록 게을러지지 않았으나,
친분이 두터운 사람에게 마음 쓰는 것이 지나쳤고
친지나 당류를 위하여 상의 은혜를 구하되
구차한 짓도 피하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이 때문에 비평하였다.
현종실록 19권 12년(1671) 9월 23일 이경석의 졸기이다.

이경석은 정종의 왕자 덕천군의 6대손이다.
아버지는 동지충추부사를 지낸 이유간이다.
예학의 대가인 김장생의 문인으로 19세에 진사가 되고
21살에 중광별시에 합격하였다.
인목대비 폐비상소에 가담하였다는 이유로 합격이 모두 취소되었다.
그는 인조반정이후 문과에 급제하여 뛰어난 학식과 온화한 성품을 바탕으로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의 자리인 영의정에 오른 인물이다.
그는 인조 19년(1641) 소현세자의 스승이 되어 심양으로 가서 소현세자와 함께
심양에서 병자호란 포로 석방에 많은 힘을 쏟았다.
잠시 귀국한 뒤 인조 20년(1642) 심양으로 돌아가다 한 사건을 만난다.
명나라의 선박이 선천에 정박하였던 사실이 청나라에 뒤늦게 알려졌다.
청나라가 나서 수사에 나섰다. 이경석이 왕을 대신해서 청나라에 설득했다.
“명나라의 잠상(潛商)이 우연히 정박한 것이다.
조선의 조정과는 무관한 일이다.”
청은 이 사건과 관련하여 이경석을 만주 봉황성 등에 구금했다.
그는 8개월 만에 ‘영원히 서용하지 않는다’(永不敍用)는 조건으로
겨우 석방되어 귀국했다.
 “이제 살아서 돌아오긴 하였으나 복명하지 못하며
다시 용안을 뵙는다는 것도 기약할 수 없으니,
신의 죄과가 더욱 무겁습니다. …
종이를 앞에 대하니 눈물이 흘러 무슨 말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인조실록> 20년 12월17일)라는 글은 그의 심정을 잘 대변한다.
<선조실록> 개수(改修) 작업 등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일을 했다.
인조 23년(1645) 영불서용 조처가 풀림에 따라 이조판서로 임용되었고,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宋浚吉) 같은 사림들을 대거 등용해
한때는 그들의 주인으로 불렸다.

 

효종 1년(1650) 산림의 공세로 권력을 빼앗긴 김자점(金自點)이
역관 이형장(李馨長)을 시켜 북벌 계획을 밀고했다.
청나라 사문사(査問使) 6명이 조사차 의주로 나왔다.
북벌 계획이 밝혀지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어
효종이 밤새 자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사대부 집안에서 이삿짐을 싸는 등 인심이 흉흉할 때 나선 인물이 이경석이었다.
이경석이 “저들이 만일 무리한 일로 힐책할 경우 신이 직접 담당하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나라가 무사하다면 신이 어찌 감히 몸 하나를 아끼겠습니까?”
라고 말하자 효종은
“경의 나라를 위한 정성이 간절하다 할 만하다”
(<효종실록> 1년 2월8일)라고 칭찬했다. 


청천강을 건너며 지은 그의 시다.
  “한밤에 충신한 마음으로 강을 건너니/
이 마음 오직 귀신만 알 뿐이로다”(半夜直將忠信涉/ 此心惟有鬼神知)
 청나라 사신은 모든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는 이경석을 ‘대국을 속인 죄’로
몰아 극형에 처하려 했다. 효종이 그의 구명을 간청하며 막대한 뇌물을
전달한 덕분에 겨우 목숨은 건졌으나
의주의 백마산성에 갇혀 앞일을 기약할 수 없었다.
이경석은 다시 ‘영원히 서용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투옥 1년 만에 석방되었다.
귀국길에 사민(士民)들이 길가에 몰려들어 환호했다는 데서 그의 신망을 알 수 있다.
귀국 뒤 이경석은 광주(廣州)에 은거하고 금강산 유람을 하는 등
정사에서는 한발 떨어져 지냈으나 효종이 자문하면 정성껏 도왔다.
효종 6년(1655) 청나라 사신이 이경석이 서울에 있는 것을 질책함에 따라
아들의 임지인 안협(安峽)으로 피했다가 철원으로 이주하는 등 다시 시골을 전전했으나
효종은 그의 건의는 무조건 들어줄 정도로 그를 높였다.
74살이었던 현종 9년(1668)에는 궤장잔치가 내려졌다.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 이후 50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듬해 현종은 온양 온천에 거동하면서 이경석을 유도(留都)대신으로 삼았다.
국왕이 없는 서울을 맡길 정도로 신임한다는 뜻이었다.
이때 온양 행궁에 있는 현종에게 올린 상소가 뜻밖에도 송시열과 분쟁이 되면서
그는 시비에 휩싸인다.
“지난날 조정에는 급히 물러나려는 신하들이 이어지더니,
오늘날 행궁에는 달려가 문안한 신하가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
군부가 병이 있어 궁을 떠나 멀리 초야에 있으면 사고가 있거나
늙고 병들었거나 먼 곳에 있는 자가 아니라면 도리에 있어서
이와 같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는 나라의 기강과 의리에 관계된 것입니다.”(<현종실록> 10년 4월3일)

청나라에 포로로 끌려간 아녀자들을 데려오려면 속환이라 하여 돈을 치러야 했다.
이 또한 돌아온 아녀자들을 기다리는 것은 죽음뿐이었다고 한다.
돌아오는 환향녀들이 홍제천에서 몸을 씻으면 다시 순결해질 수 있다는 이야기가 퍼졌다.
이들이 모두 도성에 들어오기전에 홍제천에서 몸을 씼씻었다고 한다.
 실제로 그들에게 사대부들은 죽음을 강요하였다.
척화론자들은 재가한 여자의 자식들이 관직에 등용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자식들마저도 관직에 등용해서는 안 된다 하였다.
이경석은 이 주장에 대해서도 여자의 재가와
포로로 끌려간 일은 경우가 다르다며 임금을 설득했다.
유교가 조선의 바탕이념이었다.
현실적으로 나라를 이끌어가는 백성들에게는 맞지 않는 사상이다.
나라가 백성을 지키지도 못하면서 도리나 의리 등만을 따지는 것으로 정말 말이 안 된다.
그 당시에 이경석은 그가 천거한 송시열에 의해서 개도 그가 남긴 밥은 먹지 않을 것이라는 등 철저하게 오랑캐를 섬겨 자신의 이익을 챙긴 사람으로 후대에까지 손가락질을 받았다.

 

치욕의 삼전도비문

한강이야기 2013. 7. 15. 22:09 Posted by 조영희

 

청나라는 조선에 청나라 황제의 공덕을 찬양하는'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를
삼전도 현장에 건립할 것을 요청한다. 문제는 비문을 찬술하는 작업이다.
비변사에서는 찬술할 인물로 이경석 장유 이경전 조희일 등 네명을 인조에 극비리에 천거한다.
인조실록은 인조15년(1637) 11월 25일 기사를 살폈다.
"장유(張維)·이경전(李慶全)·조희일(趙希逸)·이경석(李景奭)에게 명하여 삼전도비(三田渡碑)의 글을 짓게 하였는데, 장유 등이 다 상소하여 사양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세 신하가 마지못하여 다 지어 바쳤는데 조희일은 고의로 글을 거칠게 만들어 채용되지 않기를 바랐고 이경전은 병 때문에 짓지 못하였으므로, 마침내 이경석의 글을 썼다."
서로 꺼리는 일이었다. 이들 가운데 이경전은 병으로 세상을 떠난다.
나머지 3명이 모두 글을 지어 인조에 올린다.
인조는 이 글쓰기에 가장 싫어하였던 이경석을 조용히 불러 간곡히 부탁한다.
중국 춘추시대의 월나라 제2대 왕인 구천(句踐)이 오나라에서 치욕을 참고 신첩 노릇을 하면서
와신상담하다가 끝내 부차(夫差) 에게 당한 치욕을 갚았다는 고사를 인용하면서  
"상제의 법칙만이 위엄과 덕을 함께 펴도다. 황제께서 동을 정벌하시니 그 군사 10만이로다.'
그는 이런 문구로 가득찬 비문을 짓고만다.
이경석나라의 존망(存亡)이 달려 있는 일이며,
후일을 도모하는 것은 나의 역할이니 오늘은 다만 문자로 저들의 비위를 맞추어
일을 더 격화되지 않도록 하는 것 뿐이다"라고 하면서 인조는 간곡하게 비문의 찬술을 부탁하였다.
이경석은 자신의 명예보다는 국가의 안위를 먼저 생각한 끝에 어려운 결단을 내리고 비문을 짖게 되었다.

인조실록은 인조16년 2월 8일
<장유와 이경석이 지어 청나라에 보낸 삼전도 비문>기사를 옮긴다.
장유(張維)와 이경석(李景奭)이 지은 삼전도 비문(三田渡碑文)을
청나라에 들여보내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택하게 하였다.
범문정(范文程) 등이 그 글을 보고, 장유가 지은 것은 인용한 것이 온당함을 잃었고
경석이 지은 글은 쓸 만하나 다만 중간에 첨가해 넣을 말이 있으니
조선에서 고쳐 지어 쓰라고 하였다.
상이 경석에게 명하여 고치게 하였다. 그 글은 다음과 같다.
“대청(大淸) 숭덕(崇德)1447) 원년1448) 겨울 12월에,
황제가 우리 나라에서 화친을 무너뜨렸다고 하여 혁연히 노해서
위무(威武)로 임해 곧바로 정벌에 나서 동쪽으로 향하니, 감히 저항하는 자가 없었다.
그 때 우리 임금은 남한 산성에 피신하여 있으면서 봄날 얼음을 밟듯이,
밤에 밝은 대낮을 기다리듯이 두려워한 지 50일이나 되었다.
동남 여러 도의 군사들이 잇따라 무너지고 서북의 군사들은 산골짜기에서 머뭇거리면서
한 발자국도 나올 수 없었으며 성 안에는 식량이 다 떨어지려 하였다.
이때를 당하여 대병이 성에 이르니, 서릿바람이 가을 낙엽을 몰아치는 듯
화로 불이 기러기 털을 사르는 듯하였다.
그러나 황제가 죽이지 않는 것으로 위무를 삼아 덕을 펴는 일을 먼저 하였다.
이에 칙서를 내려 효유하기를
‘항복하면 짐이 너를 살려주겠지만, 항복하지 않으면 죽이겠다.’ 하였다.
영아아대(英俄兒代)와 마부대(馬夫大) 같은 대장들이
황제의 명을 받들고 연달아 길에 이어졌다.
이에 우리 임금께서는 문무 여러 신하들을 모아 놓고 이르기를
‘내가 대국에 우호를 보인 지가 벌써 10년이나 되었다.
내가 혼미하여 스스로 천토(天討)를 불러 백성들이 어육이 되었으니,
그 죄는 나 한 사람에게 있는 것이다. 황제가 차마 도륙하지 못하고 이와 같이 효유하니,
내 어찌 감히 공경히 받들어 위로는 종사를 보전하고 아래로는 우리 백성들을 보전하지 않겠는가.’ 하니,대신들이 그 뜻을 도와 드디어 수십 기(騎)만 거느리고 군문에 나아가 죄를 청하였다.
황제가 이에 예로써 우대하고 은혜로써 어루만졌다.
한번 보고 마음이 통해 물품을 하사하는 은혜가 따라갔던 신하들에게까지 두루 미쳤다.
예가 끝나자 곧바로 우리 임금을 도성으로 돌아가게 했고,
즉시 남쪽으로 내려간 군사들을 소환하여 군사를 정돈해서 서쪽으로 돌아갔다.
백성들을 어루만지고 농사를 권면하니,
새처럼 흩어졌던 원근의 백성들이 모두 자기 살던 곳으로 돌아왔다.
이 어찌 큰 다행이 아니겠는가.
우리 나라가 상국에 죄를 얻은 지 이미 오래 되었다.
기미년1449) 싸움에 도원수 강홍립(姜弘立)이 명나라를 구원하러 갔다가 패하여 사로잡혔다.
그러나 태조 무황제(太祖武皇帝)께서는 홍립 등 몇 명만 억류하고 나머지는 모두 돌려보냈으니,
은혜가 그보다 큰 것이 없었다. 그런데도 우리 나라가 미혹하여 깨달을 줄 몰랐다.
정묘년1450) 에 황제가 장수에게 명하여 동쪽으로 정벌하게 하였는데,
우리 나라의 임금과 신하가 강화도로 피해 들어갔다.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하자, 황제가 윤허를 하고
형제의 나라가 되어 강토가 다시 완전해졌고, 홍립도 돌아왔다.
그 뒤로 예로써 대우하기를 변치 않아 사신의 왕래가 끊이질 않았다.
그런데 불행히도 부박한 의논이 선동하여 난의 빌미를 만들었다.
우리 나라에서 변방의 신하에게 신칙하는 말에 불손한 내용이 있었는데,
그 글이 사신의 손에 들어갔다. 그런데도 황제는 너그러이 용서하여 즉시 군사를 보내지 않았다.
그러고는 먼저 조지(詔旨)를 내려 언제 군사를 출동시키겠다고 정녕하게 반복하였는데,
귓속말로 말해 주고 면대하여 말해 주는 것보다도 더 정녕스럽게 하였다.
그런데도 끝내 화를 면치 못하였으니, 우리 나라 임금과 신하들의 죄는 더욱 피할 길이 없다.
황제가 대병으로 남한 산성을 포위하고,
또 한쪽 군사에게 명하여 강도(江都)를 먼저 함락하였다.
궁빈·왕자 및 경사(卿士)의 처자식들이 모두 포로로 잡혔다.
황제가 여러 장수들에게 명하여 소란을 피우거나 피해를 입히는 일이 없도록 하고,
종관(從官) 및 내시로 하여금 보살피게 하였다.
이윽고 크게 은전을 내려 우리 나라 임금과
신하 및 포로가 되었던 권속들이 제자리로 돌아가게 되었다.
눈·서리가 내리던 겨울이 변하여 따뜻한 봄이 되고,
만물이 시들던 가뭄이 바뀌어 때맞추어 비가 내리게 되었으며,
온 국토가 다 망했다가 다시 보존되었고,
종사가 끊어졌다가 다시 이어지게 되었다.
우리 동토 수천 리가 모두 다시 살려주는 은택을 받게 되었으니,
이는 옛날 서책에서도 드물게 보이는 바이니, 아 성대하도다!
한강 상류 삼전도(三田渡) 남쪽은 황제가 잠시 머무시던 곳으로, 단장(壇場)이 있다.
우리 임금이 공조에 명하여 단을 증축하여 높고 크게 하고,
또 돌을 깎아 비를 세워 영구히 남김으로써
황제의 공덕이 참으로 조화(造化)와 더불어 함께 흐름을 나타내었다.
이 어찌 우리 나라만이 대대로 길이 힘입을 것이겠는가.
또한 대국의 어진 명성과 무의(武誼)에 제아무리 먼 곳에 있는 자도
모두 복종하는 것이 여기에서 시작될 것이다.
돌이켜보건대, 천지처럼 큰 것을 그려내고
 일월처럼 밝은 것을 그려내는 데
그 만분의 일도 비슷하게 하지 못할 것이기에 삼가 그 대략만을 기록할 뿐이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하늘이 서리와 이슬을 내려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한다
오직 황제가 그것을 본받아
위엄과 은택을 아울러 편다
황제가 동쪽으로 정벌함에
그 군사가 십만이었다
기세는 뇌성처럼 진동하고
용감하기는 호랑이나 곰과 같았다
서쪽 변방의 군사들과
북쪽 변방의 군사들이
창을 잡고 달려 나오니
그 위령 빛나고 빛났다
황제께선 지극히 인자하시어
은혜로운 말을 내리시니
열 줄의 조서가 밝게 드리움에
엄숙하고도 온화하였다
처음에는 미욱하여 알지 못하고
스스로 재앙을 불러왔는데
황제의 밝은 명령 있음에
자다가 깬 것 같았다
우리 임금이 공손히 복종하여
서로 이끌고 귀순하니
위엄을 두려워한 것이 아니라
오직 덕에 귀의한 것이다
황제께서 가상히 여겨
은택이 흡족하고 예우가 융숭하였다
황제께서 온화한 낯으로 웃으면서
창과 방패를 거두시었다
무엇을 내려 주시었나
준마와 가벼운 갖옷이다
도성 안의 모든 사람들이
이에 노래하고 칭송하였다
우리 임금이 돌아오게 된 것은
황제께서 은혜를 내려준 덕분이며
황제께서 군사를 돌리신 것은
우리 백성을 살리려 해서이다
우리의 탕잔함을 불쌍히 여겨
우리에게 농사짓기를 권하였다
국토는 예전처럼 다시 보전되고
푸른 단은 우뚝하게 새로 섰다
앙상한 뼈에 새로 살이 오르고
시들었던 뿌리에 봄의 생기가 넘쳤다
우뚝한 돌비석을
큰 강가에 세우니
만년토록 우리 나라에
황제의 덕이 빛나리라"


 

 

정묘년 (1637) 1월 30일
한강가 삼전도 모래벌판엔 강한 눈발이 내리고 있었다.
삼전도 모래벌판에 마련된 수항단(受降壇)아래서는
조선 왕 인조가 항복의식을 거행하기 위해
청나라의 왕 홍타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강화도에서 포로로 잡혀온 세자를 비롯한 중전과
세자빈등도 인조와 함께 대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통곡을 하고 있었다.
도성을 출발하였다는 홍타시는
한나절이 지나도록 나타나지 않았다.
"부복하라! 황제 폐하 드신다."
이윽고 청나라 홍타시가 나타났다.
인조는 길라잡의 외침에 따라
차가운 땅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대신들도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이곳저곳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멀리서 홍람백황의 깃발이 나부끼며
대오를 맞춘 청나라 기병대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다그닥, 다그닥"
일정한 소리를 내어 진군해오는
그들의 표정 속에는
 점령군의 오만함이 배어있었다.
"각군은 각자의 위치를 지켜라!"
홍타시를 호위하며 앞장 서 들어오던 마부태가 명령을 하자
홍람백황의 기병들은 대오를 벌이며 흩어지기 시작했다.
홍기군은 남쪽으로 남기군은 동쪽 백기군은 서쪽
그리고 황기군은 홍타시를 호위하며
북쪽에 마련된 수항단을 향해 진군했다.
수항단의 맨 위층에는 황금장막과 우산이 쳐 있었고
홍보석으로 꾸민 화려한 보좌가 남면(南面)을 한 채 한 가운데 놓여있었다.
마부태를 호위를 받은 홍타시가 홍보석의 의자에 앉자
대기하고 있던 용골대는 항복의식이 시작됨을 알렸다. 
"원래 항복 예식을 행할 때는
항자(降者)는 상복을 입고 삼껍질을 머리에 두르며
팔은 뒤로 얽어맨 채 입에는 구술을 물고
수레에 상여를 실어 죽은 형세를 하여야 한다.
하지만 황제께서는 조선의 왕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3배9고두의 간단한 예로 의식을 거행한 다음
소를 잡아 피를 내어 이를 같이 마심으로써 군신간에 맹세를 하게 하셨다."
순간 무릎을 꿇고 부복했던 백관들 사이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나왔지만
이들의 소리는 철저히 무시되었다.
"이제부터 3배9고두의 의식을 거행하겠소.
조선 왕은 앞으로 나서서 한 계단 오를 때마다 고두의 예를 행하시고
중간층에 오른 다음에는 삼 배를 올리시요."
인조는 명령을 따르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순간 수항단 꼭대기에서 벼락같은 소리가 쩌렁쩌렁 울려왔다.
"조선 왕은 다시 자리에 앉으시요.
항복한 사람이 감히 불손하게 황제 앞에서 어떻게 고개를 든다 말이요."
홍타시 곁에서 그를 호위하고 있던 마부태가 소리를 질렀던 것이다.
인조는 그 소리에 움찔하고는 다시 땅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조선 왕은 고개를 숙이고 수항단의 첫 계단 앞에 서시오."
다시한번 용골대가 명령하자 곤룡포를 벗고
여진식의 검은 옷으로 갈아입은 인조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고개를 숙이고 수항단의 첫 계단 앞에 섰다.
"고두라 함은 무릎을 꿇고 앉으면서 두 손을 땅에 대고
엉덩이를 발꿈치에 붙이고 머리가 땅에 닿도록 굽히는 인사법이오.
조선 왕은 한 계단을 오를 때마다 고두를 하고 오르시오."
수항단은 세층으로 마련되었다.
그 한 층은 아홉 개의 계단 위에 마련되었다.
1월 30일 인조는 세자 등 호행(扈行) 500명을 거느리
인조가 중간에 오르기 위해서는 아홉개의 계단을 올라야 한다.
인조는 결국 아홉번의 고두를 해야하는 것이다.
인조는 어찌할 바를 몰라 망설였고 뒤에 무릎을 꿇고 앉아
두 손을 땅에 대고 머리를 조아리고 있던 백관들 속에서는
울음소리가 점점 크게 울려나왔다.
"어서 행하지 않고 무얼 하시오."
다시한번 맨 위층에서 마부태가 큰 소리로 꾸짖었다.
인조는 드디어 결심한 듯 첫 계단을 오른 다음 무릎을 꿇고 앉아
두 손을 땅에 대고 머리를 조아린 다음 일어섰다.
"다시 하시오.
고두라 함은 머리가 땅에 완전히 닿아야 하는 것이오."
역시 마부태였다.
인조는 온갖 수치를 감내하듯 잠시 머뭇거리다
차가운 돌계단에 무릎을 뚫은 다음 두 손을 땅에 대고
이마가 땅에 닫도록 머리를 숙였다.
순간 '쿵'하는 소리가 나며
인조의 머리가 차가운 돌계단에 부딪쳤다.
한 칸을 올랐다.다시 한번 인조는 무릎을 꿇고 고두을 올렸다.
'쿵'
내린 눈이 얼어 붙어 마치 칼날처럼 날카롭고 단단하여
인조의 머리가 부딪치자 이마에서는
한 줄기 피가 흘러 내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다.
이 광경을 목도하고 있던 태자와
대군 신하들은 통곡을 하며 몸을 떨며 슬퍼했다.
한칸 또 한칸 올라설 때마다
돌계단에 부딪친 인조의 머리에서는 피가 흘러내려
이제 그의 얼굴은 피범벅이 되었다.
흘러 내리던 핏줄기는 눈물과 어울어져 차가운 날씨에
곧장 얼어 붙어 인조의 얼굴에 고드럼처럼 맺혔다.
마침내 아홉칸에 올라선 인조는
자신의 비참해진 몰골을 보이기 싫어
땅에 고개를 숙였다.
"조선 왕은 이제 황제 폐하께 삼배를 올리시오."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나와
삼전도에서 청나라 청나라 황제 홍타시에게 항복한다.
 인조는 1637년 1월 30일 청나라 황제 홍타시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땅에 찌는 굴욕의 항복 협정을 맺고
한강을 건너 환도하였다. 
지금으로부터 374년 전 우리 슬픈 굴욕의 역사다.
청나라는 맹약(盟約)에 따라 소현세자·빈궁(嬪宮)·봉림대군 등을 인질로 하고,
척화의 주모자 홍익한·윤집(尹集)·오달제(吳達濟) 등 삼학사를 잡아,
2월 15일 철군하기 시작하였다.
이로써 조선은 완전히 명나라와는 관계를 끊고 청나라에 복속하게 되었다.

 

노강서원과 박태보의 묘

한강이야기 2013. 7. 15. 15:24 Posted by 조영희

노강서원이다. 원래 김시습의 영당인 청절사(淸節祠)가 있던 자리였다.
기사환국 때 인현왕후의 폐위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진도로 귀야가는 길에
노량진에서 순절한 박태보를 기리기 위해 노량진에 건립한 노강서원이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도 살아남은 47개 서원 중 하나였으나
1950년 한국전 때 소실되었다.
1967년 아버지 서계 박세당이 은거한 의정부시 장암동 석천동 수락산 자락으로 옮겼다.
위패를 모시고 있는 사당은 정면 3칸 건물로 맞배 지붕을 했으며 양옆에 동재와 서재가 있다.

경내 건물로는 사당, 동재·서재, 고직사 등과 출입문이 있다.
교육장소로 사용되는 강당은 따로 두지 않았다.
사당은 박태보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건물로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으로 꾸몄으며,
각 칸에는 4짝으로 이루어진 문을 달았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새 날개 모양의 익공 양식을 사용하였다.
가운데 칸에 용머리를 첨가하였다.
동·서재는 온돌방으로 꾸며 유생들이 공부하면서 기거하는 건물이다.
앞면 3칸·옆면 1칸 규모로 앞에는 툇마루를 두었다.
해마다 3월과 9월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13만평이나 된다는 반남 박씨의 문중 묘역이다.
묘역 맨앞 좌측에 박태보의 묘가 있다.

박태보의 묘 건너편에는 서계 박세당의 묘가 있다. 방형(사각)의 묘다.
서계 박세당의 묘는 정경부인 의령남씨와 광주정씨를 함께 묻은 세분의 합장묘다.
첫부인 의령남씨는 남일성의 따님으로 약천 남구만(南九萬)은 서계의 손아래 처남이였다.
청구영언에 남아 있는 남구만의 시 한수 초등학교때 부터 교과서에서 배웠던 시가 생각난다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소치는 아희놈은 상기아니 일었느냐
재너머 사래긴밭을 언제갈려 하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