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문신 박태보가 귀양간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거리 거리는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루었다.
조선 제일의 충신의 얼굴을 한번이라도 보겠다는 것이었다.
박태보는 숙종 때 문신으로 왕이 장희빈을 불러들여 왕비를 삼고 인현왕후 민씨를 폐출할 때
정면으로 간하다가 잡혀 참혹한 형벌을 받고 죽은 조선의 대표적인 선비이다.
종묘 제향에 향로를 반드는 봉로관이 되었을 때 으레 물수건으로 싸서 드는 법이건만
나랏일에 약간 뜨겁다고 싸서 들다니 말이 되느냐고 맨 손으로 들었다고 한다.
누릿한 냄새가 나기에 왕이 돌아다 보니
박태보의 향로든 손 끝이 타서 노란 연기가 오르는데
눈썹 하나 까딱 않더라는 그런 분이다.
 "너는 요놈 뜨거운 것 잘 참더구나"
숙종은 중전을 폐위하는 것을 간 했을 때도 친국하는 자리에서
인두를 달궈 단근질을 해서 역사상에 드문 참혹한 형벌을 가했다.
”세상에 저럴 수가!”
박태보의 짓이겨진 처참한 얼굴을 보고 사람들은 말문을 잃었다.
곳곳에서 통곡이 터져 나왔다.
남자들은 박태보의 가마를 서로 메겠다고 나섰다.
한강건너 노량진에 있는 사육신 묘지 부근에 다다랐을 때다.
박태보는 고문으로 생긴 상처가 터져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그는 아버지 '박세당'과 아들을 불렀다.
아버지와 아들은 한동안 말 없이 눈물만 떨구고 있었다.
그러더니 박세당이 아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너는 다시 회복될 것 같지 않구나.
여기서 조용히 죽어 네 충절을 나타내는 게 옳은 일이 아니겠느냐?”
박태보의 눈에서도 한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버님 분부대로 따르겠습니다.”
아버지 박세당이 울면서 한강을 건너는 것을
하염없이 지켜보던 박태보는 얼마 후 숨이 끊어졌다.
그의 마지막은 한 여인이 지켰다는 전설이다.
박태보는 어려서부터 슬기롭고 또 얼굴이 남중일 색(男中一色)이었다.
어느 날 참판 이종염(李宗燁) 집에 심부름하는 여인 하나가
그의 아름다운 모습에 반하여 박태보의 유모에게 이 사실을 알리자,
유모가 그 사정을 딱하게 여겼으나 박태보의 심지가 곧으므로
차마 입을 열어 볼 수가 없어 그의 모친에게 이야기를 해보았다.
그의 모친 역시 그 여인의 짝사랑을 동정하여
남편 서계(西溪) 박세당에게 아들을 좀 달래보라고 청하였다.
아버지 박세당이 박태보를 불러 여인에게 한을 남기면
앞으로의 길에 장애가 될 것이라 훈계하였다.
박태보도 부친의 뜻을 거역하지 못하였다.
그 여인은 박태보의 양친을 뵙고 스스로 머리를 쪽 지어 출가한 부녀처럼 하고 다녔다.
세월은 흘러 박태보는 그 뛰어난 재주로 벼슬길에 올랐고 여인은 그의 기억에서 차츰 멀어졌다.
숙종 15년(1689) 중전에 대한 장희빈의 끈질긴 모함이 성공하여
왕이 중전을 폐비하려 하자 직언(直言)을 잘 하던 박태보는 이 소식을 듣고
붓을 들어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진도로 귀양을 가게된다.
귀양지로 가는 길에 국문 시 입은 장독(杖毒)과 화상 (火傷)이 심해
친구 집에 있는 노량진에 머물렀다.
이때 어느 여인이 와서 박태보를 한번 뵈옵기를 청하였다.
방문객은 바로 전일에 박태보를 사모하여 혼례식도 올리지 않고
출가한 부녀자처럼 쪽을 지고 다니던 그 여인이었다.
박태보는 멀어져 가는 정신을 간신히 수습하여
겨우 손을 들어 여인의 손을 한번 꽉 잡은 다음 그만 목숨이 다했다.
여인은 그 앞에서 울고 또 울다가 일어나 나갔다.
그 후 인현왕후가 복위되고 노강서원이 완성되던 날,
그 여인은 소복을 입고 서원 뒤 서까래에 목을 매어 달아 싸늘하게 죽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