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흑석동은 한강가에 있는 마을이다.
면적 1.68㎢, 인구 4만 2268명 서울특별시 동작구에 속한 동이다.
한강대교와 동작대교 사이의 남쪽에 있다.
동·서·남쪽의 3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북쪽은 한강에 닿아 있다.
동쪽은 동작동, 서쪽은 본동, 남쪽은 상도동과 접해 있는 흑석동이다.
흑석1동사무소 남쪽 일대에서 나오는 돌이 검은색을 띠므로
검은돌(黑石)마을이라 한 데에서 유래한 흑석동이다.
지금의 흑석1동 232, 243번지(12·14·16·17통) 일대를 지칭했다.
은로초등학교 자리에는 동사무소가 있었다.
또한 남부동에는 우리 전통 한옥 120여채가 지금도 밀집되어 있어
 일명 한옥촌이라고도 부른다.
지금의 흑석동 232번지와 243번지 일대에 검은색 돌이 나온다고 하여
지명을 '검은돌' 이라고 했다.이것을 한자로 바꿔 흑석(黑石)이라고 칭했다.
흑석동은 조선시대 말까지 경기도 과천군 하북면 흑석리였다.
1914년 3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111호와 동년 4월 1일
경기도령 제3호에 의한 경기도 구역획정 때 시흥군 북면 흑석리로 칭하였다.
그 후 1936년 4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8호로 경성부에 편입되어 흑석정이 되었다.
1943년 6월 10일 조선총독부령 제163호로 구제도(區制度)를 실시하면서 영등포구 흑석정이 되었다.
광복 후 1946년 10월 1일 일제식 동명을 우리 동명으로 바꿀 때 흑석동이 되었다.
그후 1973년 7월 1일 대통령령 제6548호로 영등포구에서 관악구를
분리 신설할 때 관악구에 이속되었다.
1980년 4월 1일 대통령령 제9630호로 관악구에서 동작구를 분구하면서
흑석동은 동작구에 속하여 오늘에 이른다.
검은돌시장
흑석2동 9, 43번지 일대에 있던 시장이다.
이 시장은 주로 야채류, 과일류 등 각종 농산물이 거래되었다.
 광복 직후 길거리에서 안쪽으로 밀려 지금의 흑석3동에 있는 흑석시장 자리에 정착하게 된 것이다.
검은돌시장은 당시 서초동·양지동, 과천지방 사람들이 많이 이용하였다고 한다.
범바위
흑석2동 시민아파트가 있었던 아래쪽 한강변에 있었던 바위이다.
옛날 이곳에는 많은 낚시꾼들이 모여들어 고기잡이를 하였다 한다.
어느날 한 낚시꾼이 커다란 잉어 한 마리를 낚자
갑자기 눈보라와 모래가 휘날려 눈 앞이 보이지 않았다.
이상히 여긴 나머지 뒤를 돌아다보니 커다란 호랑이가 나타나
어슬렁거리며 앞발을 내미는 것이었다.
낚시꾼이 질겁을 하고 도망을 치자 호랑이도 그 뒤를 쫓아왔다.
낚시꾼이 더 이상 도망을 가지 못하고 마침 그곳에 구멍이 뚫린 큰 바위 속으로 들어갔더니
호랑이가 들어오지 못하고 밖에서 두리번거리고만 있었다.
그러자 그는 그 바위 속에 갇혀서 나오지도 못하고 결국 죽었다.한다.
이 호랑이가 앞발짓을 한 것은 잉어를 달라는 뜻이었다.
 낚시꾼은 자기를 잡아 먹으려고 하는 줄 알고 결국 죽음을 당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 오고 있다.
공동묘지
흑석시장 입구에서 중대부고로 가는 길 양쪽과 골짜기에 공동묘지가 있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에는 옛날 본동·노량진동·상도동,
그리고 흑석동 주민들이 세상을 떠나면 이곳에 묘를 썼다 한다.
그러나 이 지역이 서울시로 편입되면서 묘지 사용이 금지되었다.
 서울시가 기존 묘도 이장하도록 공고한 후
이 지역을 개인에게 불하하여 지금의 주택들이 들어서게 되었다.
서달산
흑석동 남서쪽 달마사(흑석1동 37번지)가 있는 뒷산으로 돌이 많이 나왔다고 한다.
 달마산
달마사라는 절이 있는 산 이름이다.
집박굴우물
달마사 밑에서 나던 맑은 물로 약수는 아니지만 물맛이 썩 좋았다고 한다.
대동우물
흑석1동 156번지 지금의 성모병원 자리에 있던 우물이다.
 옛부터 동리주민 약 80여호가 사용하였던 큰 우물이었으나
병원이 들어서면서 메꾸어졌다.
대머리산
흑석2동 26번지 일대로 지금의 벧엘교회 옆 동산을 말한다.
이 산의 꼭대기 부분에 나무가 하나도 없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도당째
학도의용군 현충비가 세워진 위에는 큰 바위가 있었다.
바위 사이에 아름드리 소나무가 한 그루 서 있었다.
전에 마을 주민들은 이곳에 칠성님을 모시는 도당을 만들어
일년에 봄, 가을 두 번씩 마을에 풍년이 들기를 기원하고,
질병이 없기를 비는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일명 도당칠성이라고도 하였다.

명수대
서달산 꼭대기에 있었던 건축물이다.
1920년 일본인 부호 목하영(木下榮)이란 사람이
이곳에 별장을 짓고 놀이터를 만들었다고 한다.
맑은 한강물이 유유히 흐르는 경치 좋은 곳이라 하여
명수대란 이름을 붙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광복 후 이 건물을 철거되었다.

명창굴
흑석1동에서 상도동으로 넘어가는 중앙대학교 중문 부근의
마을 이름으로 지금도 오래된 한옥이 있다.
옛날 이 마을 앞으로 조그마한 개천이 흘렀다고 한다.
 
비개마을
흑석2동 26·28·33·38번지 일대로 한강변 기슭에 비스듬히 비껴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현재 버스정류장 이름으로도 유명하다.

찬우물
비개마을 부근 산버덩에 있었던 우물로 물이 매우 차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솔밭
흑석 3동 7, 8통 일대 지역에 있었던 마을로
옛날 이곳에 소나무가 많이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안말·새말
안말은 흑석1동 5통(125-133번지)일대의 마을을 일컫는다.
새마을의 유래는 을축년 큰 장마 때 안말이 침수되자
그곳 주민들이 좀 더 높은 지대이던 지금의 중앙대학교 앞으로
 옮겨서 새로 집을 짓고 살게 되면서 생긴 것이다.
그리고 흑석1동 156번지 성모병원이 들어선 지역의 마을을 웃말이라고 칭했다.

약수동
흑석3동 69번지 6통 일대의 마을로 옛날 이곳에서
아주 맛있는 약수물이 나왔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연못께
연못시장(흑석동 101·102·182번지)과 주택은행이 있는 일대에 연못이 있었다고 한다.
이 연못은 일제 때 일본인 목하영(木下榮)이 이 곳에 5천평 정도의 커다란 연못을 파고
가운데 나무를 심어 섬을 만들어 놓은 까닭에 동리 사람들의 휴식처와 낚시터로도 이용되었다고 한다.
광복후에 이곳을 메꾸고 시장이 생기자 연못자리에 있는 시장이라 하여 연못시장이라고 불리어지게 되었다.

완성군산
완성군산(일명 왕성군산)은 전주이씨 덕천군파 완성군의 묘소가 있는 산으로,
흑석2동 54-323호에 양옥으로 된 재실(齋室)이 있으며
후손이 이재주(李在周)가 20년 전부터 이곳을 관리하고 있다.
이 산을 왕성군산으로 칭하는 것은 완성군의 묘소가 있기 때문인데, 이를 잘못 발음하여 불려진 것이다.

재강굴산
붉은 산이란 데서 붙여진 이름으로 중앙대학교 뒷산을 일컫는데,
중앙대학교를 설립한 임영신의 묘가 있다.


 

공암진의 '투금(投金)' 형제 사랑이야기

전설 2013. 8. 25. 18:42 Posted by 조영희

 

경강은 광나루에서 시작하는 서울의 한강이다.
한강의 나루 가운데 마지막 나루 공암나루다.
그 나루터가 지금은 한강 강변고속도로 건설로 땅위에 올라서 있다.
고려 공민왕 때 이억년 이조년 형제가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남쪽 지방에서
일을 보고 개성의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공암진에 도착하였다.
앞서 가던 동생 조년이 갑자기 허리를 구부리더니
땅 속에서 큰 황금 덩어리 두 개를 집어 들었다.
"형님, 우리가 길을 가다가 우연잖게 이러한 황금을 얻었으니
하나는 제가 갖고 하나는 형님이 갖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동생 조년의 기특한 제안을 형 억년이 받아들였다.
이들 형제는 황금 두 덩어리를 서로 우애 좋게 나누어 갖었다.
이들 형제는 공암진에서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배가 강 가운데 이르렀을 때다.
동생 조년이 짐보따리에서 큰 황금덩어리를 꺼내 강에 던졌다.
갑자기 벌어진 일이었다. 형 억년이 동생 조년에게 물었다.
"아우야! 아까 우리가 나누어 가진 황금덩어리를 버린 것 아니냐?"
"예, 형님 맞습니다. 그 황금덩어리입니다."
"아니! 왜 그 황금덩어리를 강에 버렸느냐?"
"죄송합니다.형님! 평소 형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무척이나 깊었습니다.
그 금덩어리를 나누고부터 형님을 꺼리는 마음이 생기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형이 없었으면 두 덩어리가 내 것일 텐데하는 욕심과 함께 말입니다.
그게 두려워 황금을 그냥 물에 던진 것입니다."
"그래 네 말이 옳다. 나도 그랬지."
형 억년이도 황금덩어리를 강에 던저버렸다.
이 소문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황금을 던져 버린 여울이라고 해서
공암나루를 투금탄(投金灘)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황금을 던져 버린 물가라고 해서 김포(金浦)라는 지명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이화에 월백하고 은한이 삼경인제/
일지춘심을 자규야 알랴만은/
다정도 병인양 하여 잠 못들어 하노라/"
시조 다정가(多情歌)다. 만인이 좋아하는 시조다.
'형제투금'의 사건의 주인공 동생 이조년은 이 시조를 지었다.
그는 고려 후기 충렬왕·충선왕·충숙왕·충혜왕 4대에 걸쳐 왕을 보필한 문신이다.
요즈음 글로 다정가를 바꾸어 보았다.
"하얀 배꽃 밝은 달빛, 은하수는 한밤인데
아직 남은 푸른 내 맘, 소쩍새가 어찌 알까
정 많음이 병이라서, 잠 못 들고 뒤척이네."
그의 형제들의 이름이 좀 특이하나 우애는 남달랐다.
맏형 이백년(李百年) 둘째 이천년(李千年) 셋째 이만년(李萬年),
넷째 이억년(李億年) 다섯째 이조년(李兆年) 이다.


 

 

 

 

한강의 발원지 검룡소를 찾아서

한강이야기 2013. 8. 21. 20:17 Posted by 조영희

 

강원도 태백은 백두대간의 분수령을 끼고 있다. 가히 강의 고향이라고 할만한  태백이다.
백두대간 금대봉(1,418m) 기슭의 검룡소(儉龍沼)는 한반도의 젖줄인 한강의 발원지이다.
태백시내 한복판에 자리한 황지(黃池)는 영남 땅을 적시며 흐르는 낙동강의 발원 연못으로 유명하다.
이웃 삼수령 정상 휴식터에 있는 삼수정 앞 상징탑에서 삼수령의 글을 아래에 옮긴다.
"하늘이 열리고 우주가 재편된 아득한 옛날
옥황상제의 명(命)으로 빗물 한가족이 대지(大地)로 내려와
아름답고 행복하게 살겠노라고 굳게 약속을 하고
하늘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이 빗물 한가족은 한반도의 등마루인 이곳 삼수령(三水嶺)으로 내려오면서
아빠는 낙동강으로
엄마는 한강으로
아들은 오십천강으로 헤어지는 운명이 되었다.
한반도 그 어느 곳에 내려도 행복했으리라
이곳에서 헤어져 바다에 가서나 만날 수밖에 없는
빗물 가족의 기구한 운명을
이곳 삼수령만이 전해주고 있다."
 

검룡소에는 두 개의 탐방안내소가 있다.
생태환경을 설명하는 봉사자와 문화해설을 하는 문화관광해설가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그곳에서 탐방객의 인적사항을 기록하고 신비한  1.3km의 숲 길로 들어선다.
그 입구부터가 천연의 자원이 신비스럽게 전개된다.
정부는 검룡소 일대를 명승지로 지정하여 환경을 보호하고 있다.


 
나무로 만든 다리 세심교(洗心橋)가 세상을 둘로 가른다.
다리를 건느면서 지금까지 안고 있던 근심 걱정을 다 내려놓으라고 한다.
맑은 시내물에 말끔히 씻고 다리를 건너 정(淨)한 마음으로 검룡의 세상을 만나라라고 한다.
 

검룡소 들어가는 신비의 길이다.
길 양쪽에 이깔나무 빼곡한 운치가 넘치는 산길이다.
검룡소에서 흐르는 물의 방향으로 왼쪽으로는 참나무 숲을 이루고
오른쪽으로 30~40년 전후로 식재한 것으로 보이는 낙엽송(이깔나무)으로 숲을 이룬다.
숲 속에는 식용 또 약용으로 이용하는 얼러지가 홍자색으로 앙증맞게 꽃을 피우며
어떤 새인지 보이지는 않지만 산새의 울음소리가 들려 인적 드문 계곡의 정적을 깨기도 한다.

검룡소의 안내판이다. 검룡소는 한강의 발원지로 창죽동 금대봉골에 위치해 있다.
전설에 의하면 서해에 살던 이무기가 용이 되기 위해 한강 상류를 향해 거슬러 오르다가
검룡소에 이르러 자리를 잡고 살았다. 소들이 풀을 뜯어 먹으로 오면 잡아먹었다.                               
동네 주민들은 이 검룡소를 메워버렸다.이무기는 결국 용이 되지 못했다고 한다.
검룡소는 1980년대에 복구되었다.
처음에는 금태봉 자락에 있다고 해서 금용소(金龍沼)라고 했다.
점차 마을주민 사이에서 억양상 ‘금’의 발음이 ‘검’으로 읽혀갔다.
그래서 아예 금(金)자 대신 ‘검(儉)’자로 변경키로 했다.
민족의 시조인 단군 왕검(王儉)의 ‘검(儉)’을 인용해 검용소(儉龍沼)로 변경한 것이다.
지명의 변경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어법상 ‘용’(龍)을 ‘룡’으로 표기해야 한다는 지적에 따라 비로소
현재의 상용단어인 검룡소(儉龍沼)를 완성하게 됐다.
한강의 발원지는 평창 오대산 우통수로 알려졌다.
세종실록 지리지에서 우통수 기사를 옮겨서 살핀다.
"명산(名山)은 오대(五臺)이다.부(府) 서쪽에 있다.
봉우리 5가 고리처럼 벌려 섰는데, 크기와 작기가 고른 까닭에 오대산이라 한다.
서대(西臺) 아래 수정암(水精庵) 옆에서 우리샘[檻泉]이 솟아나는데,
〈물의〉 빛과 맛이 여느 물과 다르고,
그 무게도 또한 그러하므로 우통수(于筒水)라고 하며,
곧 금강연(金剛淵)은 한강물[漢水]의 근원이 된다.
봄·가을에 그 고을 관원으로 하여금 제사지내게 한다.
한강물이 비록 여러 곳의 물을 받아 흐르나,
우통수가 중심이 되어 빛과 맛이 변하지 아니해서
중국의 양자강(揚子江)과 같으므로, 한(漢)이란 이름이 이로 인하여 되었다.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 바다 어귀에 이르기 8리, 남쪽으로 삼척에 이르기 70리,
서쪽으로 횡성(橫城)에 이르기 1백 55리, 북쪽으로 양양(襄陽)에 이르기 46리이다."


태백의 광명정기 예솟아(여기서 솟아) 민족의 젓줄 한강을 발원하다.
이 비문처럼 한강의 발원지임으로 밝혀내는데는 태백 향토인들의 노력이 컸다고 한다.
김강산 전 태백문화원장이 1984년 어느날 창죽천 금대봉 기슭에서 석회암반을 뚫고
끈임없이 분출하는 물줄기를 목격한다.
김 소장은 그 날 우연히 5만분의 1 지도를 통해 당시까지 한강의 발원지로 알려진
오대산 우통수와 창죽천의 물이 합수되는 정선군 나전리를 기준으로 강물길이를 도상실측했다.
뜻밖에도 우통수가 약 53㎞, 창죽천이 약 85㎞에 달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창죽천이 우통수 보다 32㎞나 긴 하천으로,
금대봉 기슭에서 흘러나온 물줄기가 한강발원지라는 계산이었다.
안창죽 금대봉 기슭에서는 작은 샘물이 다섯 곳이상 발견됐지만 모두 창죽천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땅 속으로 스며들어 그 흔적을 알 수 없었다.
이는 태백지역 지질 특성상 석회 암반의 지하공동으로 유입되어 물구덩이로 솟아나기 때문이다.
물줄기가 가뭄시기에도 변함없이 솟아나는 최상류 지점이 바로 오늘날의 ‘검룡소’로 지정된 것이다.

 

태백시 창죽동 금대봉 기슭 검룡소와 그 일대 계곡은 특이하고
아름다운 지형 지질학적 경관을 이루고 희귀한 동식물상이 있다.
검룡소와 관련된 전설이 담겨 있는 역사 문화 경승지이다.
검룡소는 석회암반을 뚫고 하루 2천 톤 가량의 지하수가 솟아나오는 냉천(冷泉)으로
사계절 9℃ 정도의 수온을 유지하고, 20m 이상 계단상 폭포를 이루고 있다.
오랜 세월 흐른 물줄기로 인해 깊이 1~1.5m, 폭 1~2m의 암반이 푹 파여서
그곳으로 물이 흐르는데 용트림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검룡소는 둘레 20여m에 깊이를 알수 없다. 
석회암반을 뚫고 지하수가 하루 2-3천톤가량 솟아난다.
이 곳 물의 온도는 늘 9도를 유지하고 있다.
물이 솟아나는 구멍에 큰 돌이 놓여 있다.
큰 태풍 때 돌이 굴러와 용출구를 막고 앉았다고 전한다.
물 속에는 동전이 곳곳에 보인다.
환경보전을 위해 동전을 던지지 말 것을 호소하고 있다.
일부 탐방객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동전을 던진다.
검룡소에서 '복'이 쏟아질 것을 갈구하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