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운중동 한국학중앙연구원을 끼고 의왕으로 가는 옛길을 따라가면
청계산 자락  길가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석운동 산 16~18번지 경기도 기념물 제84호 이경석선생묘를 만난다. 묘역 입구에는 신도비 2기가 나란히 세워져 있다.
하나는 1754년에 세워진 원래의 비이다. 글자가 모두 깍여 보이지 않는다.
땅 속에 훼손당한채 300년동이나 묻혀 있던 비다.현재는 마모가 심하여 판독이 불가능하다.
후손들이 땅속에서 파내어 다시 세운 원래의 비다.원래의 비문을 다시 새겨 세운 새로운 신도비다.

 

원래 이경석의 신도비의 비문은 서계 박세당이 짓는다.
"노성인(老成人)의 귀중함이 이와 같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 노성인을 모욕하는 자가 있다면 천하의 불상(不祥)함이 막대하도다.
불상한 짓을 감히 한다면 또한 반드시 불상한 응보가 따를 것이다.
이것은 하늘의 도이니, 어찌 두려운 일이 아니겠는가?"
그는 우암 송시열을 노성인(老成人)을 모욕한 불상한 무리로 규정한다.
당시 사림의 영수 송시열을 준열하게 비판한다.
그는 인조를 대신해서 신하로서 삼전도비문 찬술이 부득이했음을 강조하여 이경석을 두둔했다.
마지막으로 송시열에 대해 한마디 말을 더 추가했으니,
그것은 바로 은의를 저버린 배은자(背恩者)라는 표현이었다.
그는『서계집』권22, 「영의정백헌이공신도비명(領議政白獻李公神道碑銘)」)에서
결국 박세당은 이경석을 군자로 칭송한 반면 송시열을 소인(小人),
불선자(不善者)로 단정함으로서 이듬해에 큰 화를 초래하게 된다.
그는 비명(碑銘) 마지막에 송시열에게 올빼미를,
이경석에게 봉황을 비유하면서 이경석을 군자라고 칭송했다.
"올빼미는 봉황과 성질이 판이한지라 /성내기도 하고 꾸짖기도 하였네/    
착하지 않은 자는 미워할 뿐 /군자(君子)가 어찌 이를 상관하랴  /     
나의 명문(명문)을 빗돌에 새기노니/ 사람들이여 와서 공경할지어다."
노론은 박세당이 송시열을 모욕하였다며 분노하였다.
 1703년 봄에 성균관 유생들은 박세당을 배척하는 상소(上疏)를 올렸다.
 유생의 배후에는 박세당을 제거하려는 김창협, 김창흡 등 노론(老論)의 핵심부가 있었다.
 그는 당시 송시열계 당인들의 감정을 자극하게 되어 삭탈관직을 당하고 유배를 떠나게 된다.
이경석의 신도비는 50여년 뒤인 영조 30년(1754) 이광사의 글씨를 받아 겨우 세웠다.
송시열을 따르는 노론쪽에서 신도비를 깍아내 훼손했다고 전해지는 그의 신도비다.

 

 

 

영중추부사 이경석(李景奭)이 죽었다. 사신은 논한다.
이경석은 집에서 효도하고 우애로웠으며 조정에서 청렴하고 검소하였다.
일찍부터 문망(文望)을 지녔었는데 드디어 정승에 올랐다.
나라를 근심하는 마음은 늙도록 게을러지지 않았으나,
친분이 두터운 사람에게 마음 쓰는 것이 지나쳤고
친지나 당류를 위하여 상의 은혜를 구하되
구차한 짓도 피하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이 때문에 비평하였다.
현종실록 19권 12년(1671) 9월 23일 이경석의 졸기이다.

이경석은 정종의 왕자 덕천군의 6대손이다.
아버지는 동지충추부사를 지낸 이유간이다.
예학의 대가인 김장생의 문인으로 19세에 진사가 되고
21살에 중광별시에 합격하였다.
인목대비 폐비상소에 가담하였다는 이유로 합격이 모두 취소되었다.
그는 인조반정이후 문과에 급제하여 뛰어난 학식과 온화한 성품을 바탕으로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의 자리인 영의정에 오른 인물이다.
그는 인조 19년(1641) 소현세자의 스승이 되어 심양으로 가서 소현세자와 함께
심양에서 병자호란 포로 석방에 많은 힘을 쏟았다.
잠시 귀국한 뒤 인조 20년(1642) 심양으로 돌아가다 한 사건을 만난다.
명나라의 선박이 선천에 정박하였던 사실이 청나라에 뒤늦게 알려졌다.
청나라가 나서 수사에 나섰다. 이경석이 왕을 대신해서 청나라에 설득했다.
“명나라의 잠상(潛商)이 우연히 정박한 것이다.
조선의 조정과는 무관한 일이다.”
청은 이 사건과 관련하여 이경석을 만주 봉황성 등에 구금했다.
그는 8개월 만에 ‘영원히 서용하지 않는다’(永不敍用)는 조건으로
겨우 석방되어 귀국했다.
 “이제 살아서 돌아오긴 하였으나 복명하지 못하며
다시 용안을 뵙는다는 것도 기약할 수 없으니,
신의 죄과가 더욱 무겁습니다. …
종이를 앞에 대하니 눈물이 흘러 무슨 말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인조실록> 20년 12월17일)라는 글은 그의 심정을 잘 대변한다.
<선조실록> 개수(改修) 작업 등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일을 했다.
인조 23년(1645) 영불서용 조처가 풀림에 따라 이조판서로 임용되었고,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宋浚吉) 같은 사림들을 대거 등용해
한때는 그들의 주인으로 불렸다.

 

효종 1년(1650) 산림의 공세로 권력을 빼앗긴 김자점(金自點)이
역관 이형장(李馨長)을 시켜 북벌 계획을 밀고했다.
청나라 사문사(査問使) 6명이 조사차 의주로 나왔다.
북벌 계획이 밝혀지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어
효종이 밤새 자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사대부 집안에서 이삿짐을 싸는 등 인심이 흉흉할 때 나선 인물이 이경석이었다.
이경석이 “저들이 만일 무리한 일로 힐책할 경우 신이 직접 담당하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나라가 무사하다면 신이 어찌 감히 몸 하나를 아끼겠습니까?”
라고 말하자 효종은
“경의 나라를 위한 정성이 간절하다 할 만하다”
(<효종실록> 1년 2월8일)라고 칭찬했다. 


청천강을 건너며 지은 그의 시다.
  “한밤에 충신한 마음으로 강을 건너니/
이 마음 오직 귀신만 알 뿐이로다”(半夜直將忠信涉/ 此心惟有鬼神知)
 청나라 사신은 모든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는 이경석을 ‘대국을 속인 죄’로
몰아 극형에 처하려 했다. 효종이 그의 구명을 간청하며 막대한 뇌물을
전달한 덕분에 겨우 목숨은 건졌으나
의주의 백마산성에 갇혀 앞일을 기약할 수 없었다.
이경석은 다시 ‘영원히 서용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투옥 1년 만에 석방되었다.
귀국길에 사민(士民)들이 길가에 몰려들어 환호했다는 데서 그의 신망을 알 수 있다.
귀국 뒤 이경석은 광주(廣州)에 은거하고 금강산 유람을 하는 등
정사에서는 한발 떨어져 지냈으나 효종이 자문하면 정성껏 도왔다.
효종 6년(1655) 청나라 사신이 이경석이 서울에 있는 것을 질책함에 따라
아들의 임지인 안협(安峽)으로 피했다가 철원으로 이주하는 등 다시 시골을 전전했으나
효종은 그의 건의는 무조건 들어줄 정도로 그를 높였다.
74살이었던 현종 9년(1668)에는 궤장잔치가 내려졌다.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 이후 50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듬해 현종은 온양 온천에 거동하면서 이경석을 유도(留都)대신으로 삼았다.
국왕이 없는 서울을 맡길 정도로 신임한다는 뜻이었다.
이때 온양 행궁에 있는 현종에게 올린 상소가 뜻밖에도 송시열과 분쟁이 되면서
그는 시비에 휩싸인다.
“지난날 조정에는 급히 물러나려는 신하들이 이어지더니,
오늘날 행궁에는 달려가 문안한 신하가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
군부가 병이 있어 궁을 떠나 멀리 초야에 있으면 사고가 있거나
늙고 병들었거나 먼 곳에 있는 자가 아니라면 도리에 있어서
이와 같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는 나라의 기강과 의리에 관계된 것입니다.”(<현종실록> 10년 4월3일)

청나라에 포로로 끌려간 아녀자들을 데려오려면 속환이라 하여 돈을 치러야 했다.
이 또한 돌아온 아녀자들을 기다리는 것은 죽음뿐이었다고 한다.
돌아오는 환향녀들이 홍제천에서 몸을 씻으면 다시 순결해질 수 있다는 이야기가 퍼졌다.
이들이 모두 도성에 들어오기전에 홍제천에서 몸을 씼씻었다고 한다.
 실제로 그들에게 사대부들은 죽음을 강요하였다.
척화론자들은 재가한 여자의 자식들이 관직에 등용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자식들마저도 관직에 등용해서는 안 된다 하였다.
이경석은 이 주장에 대해서도 여자의 재가와
포로로 끌려간 일은 경우가 다르다며 임금을 설득했다.
유교가 조선의 바탕이념이었다.
현실적으로 나라를 이끌어가는 백성들에게는 맞지 않는 사상이다.
나라가 백성을 지키지도 못하면서 도리나 의리 등만을 따지는 것으로 정말 말이 안 된다.
그 당시에 이경석은 그가 천거한 송시열에 의해서 개도 그가 남긴 밥은 먹지 않을 것이라는 등 철저하게 오랑캐를 섬겨 자신의 이익을 챙긴 사람으로 후대에까지 손가락질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