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강(京江)은 광나루부터 시작한다.
광나루 광진(廣津) 너븐나루 모두 넓은 나루라는 뜻이다.
이 나루는 또 버드나무가 우거진 아름다운 나루 양진(楊津)라고도 한다.
이 수호신 용이 있는 용당산에는 사당 양진사(楊津祀)이 있었다.
버드나무가 우거진 광나루의 옛 모습은 오늘에 상상이 가지 않는다.

"우난 거시 벅구기가 프른 거시 버들숩가
이어라 이어라"
윤선도의 어부사시사의 일부이다.
그 시는 아래와 같이 현대적으로는 풀이할 수 있다.
"우는 것이 뻐꾹샌가 푸른 것이 버드나무 숲인가
노 저어라 노 저어라"
민요에도 버드나무는 등장한다.
"노들강변 봄버들 휘휘 늘어진 가지에다 무정세월 한허리를 칭칭 동여매어 볼까
에헤요 봄 버들도 못 믿으리로다 푸르른 저기 저 물만 흘러 흘러 가노라"
경기민요 노들강변의 가사이다.
버드나무는 시와 그림에서 자주 등장해 우리에게는 아주 친숙한 나무이다.
실제로도 우리나라 강가이나 냇가에서 자주 볼 수 있다.
경강의 양화나루는 버드나무가 무성하고 경치가 뛰어났다.
월산대군은 눈 덮인 양화벌의 겨울경치를 <양화답설(楊花踏雪)>이라 하여
<한도십영(漢都十詠)>의 한 곳으로 손꼽았다.
한강가에서도 노들강변 광나루 난지도한강공원 등 버드나무가 번성한 곳이 참으로 많다.
버드나무가 물가에 많은 이유로는 버드나무가 물을 매우 좋아하는 수인성 식물이고
잔뿌리가 땅속에서 그물처럼 서로 엉켜 강둑을 홍수등에서 보호해주고 있는 점을 든다.
또 버드나무에는 우리의 질병을 치료해주는 좋은 성분이 있어
우리 주변에서 번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3월쯤 버드나무에 물이 오른다.
어릴 때 연필 정도의 굵기 버드나무가지로 호드기 피리를 만들어 불었다.
또 봄이 오면 버들강아지를 맛있게 따먹으면서 껌처럼 씹고 다녔다.
버드나무는 정수작용이 있어서 우물가에도 많이 심어 왔다.
유럽에서도 버드나무껍질에서 추출한 살리신을 주성분으로
 해열, 진통, 소염, 심장병, 뇌졸중 등에 사용하여 왔다고 한다.
이같이 수양버들에는 해열이나 진정의 효과가 있는 살리신이 있어
겨우내 시달린 몸을 달래고 질병예방을 위해 버들피리를 불고
즐겨 일상에서 활용하였다고 한다.
인도에는 수양버들나무는 적지만 불교와는 깊은 관련이 있다.
구강 위생뿐만 아니라 일곱가지 병을 없앤다고 하는 버드나무의 약효를 중요시 했다.
석가는 제자들이 탁발이나 수행을 위해 각지를 돌아다닐 때
반드시 휴대하는 18종의 도구의 하나로  수양버들나무 칫솔을 규정했다.
이를 단타카스타 즉 치목(齒木)이라고 말한다.
양류관음상(楊柳觀音)도 있다.
버드나무 아래 바위에 앉아있거나 오른 손에 버드나무 가지를 들고
대자비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병고(病苦)를 치유하는 관음이다.
자비심이 많고 중생의 소원을 들어줌이 마치 버드나무가 바람에 나부낌과
같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버드나무는 착생률이 좋아 어떤 방식으로 땅에 심어도 뿌리를 내린다고 한다.
잔가지 속껍질을 벗겨내면 약간 튀어나온 울퉁불퉁한 목질부가 보인다.
이곳이 땅에 닿기만 하면 즉시 뿌리를 내리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서양 의학의 아버지인 히포크라테스는 버드나무껍질에서 추출한 살리신을 주성분으로 
해열, 진통, 소염, 심장병, 뇌졸중 등에 사용하여 왔다.
현재 약국에서 판매하고 있는 아스피린'의 주원료도 버드나무에서 추출한 물질이다.
아스피린은 약으로 등장된 때로부터 100년 이상이 지났어도
지금까지 강력한 해열진통과 항염증약으로서의 가치를 잃지 않고 있다.
아스피린은 진통약으로서 병적으로 높아진 체온을 떨구지만 체온을 
정상 이하로 떨구지는 않는 것이 특징이다.
 

숯내 탄천의 '동방삭'전설

전설 2013. 4. 2. 20:15 Posted by 조영희

 

탄천은 한강의 지류이다.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에서 발원하여 성남시를 거쳐
서울특별시의 강남구 삼성동과 송파구 잠실동(신천동)을
끝으로 한강으로 유입되는 총연장 35.6km의 하천이다.

옛날 옛적에 삼천갑자(三千甲子 18만년)를 산 동방삭(東方朔)이 있었다.
동방삭이 너무 오래 살아서 천상천하(天上天下)를 막론하고 큰 골칫거리 가 되었다
동방삭은 원래 30년 밖에 살지 못 하는 운명이었다.
30살이 돼서 저승에 간 동방삭은 우연히 염라대왕과 그 신하들이 졸고 있는 모습을 목격하게 된다.
그 틈을 놓치지 않은 동방삭.
그는 저승명부에 적혀있는 자신의 수명 30(三十)에 선 하나를 그어 3000(三千)으로 바꿔버렸다.
그리곤 태연히 옥황상제와 신하들이 깨어나길 기다렸다.
잠에서 깨어난 옥황상제는 동방삭에게
 “너는 잘못 왔다. 너는 3000년을 살게 돼 있으니 나중에 다시 오거라”라고 말했다.
유유히 인간세상으로 내려온 동방삭은 그 후로 3000년을 더 살았다.
그러나 저승사자들은 3000년이 지나도 그를 찾을 수 없었다.
오랜 세월을 사는 동안 동방삭은 수많은 경험과 지혜를 모아 천지생사에 대한 모든 법칙을 알게 됐던 것이다. 그는 교묘히 저승사자들을 피하며 골탕을 먹였다.
옥황상제의 근심은 계속됐다.
 마침내 저승에서 가장 영리한 사자가 동방삭을 찾으러 인간세상으로 내려왔다.
그런데 그는 동방삭을 찾을 생각은 하지 않고 냇가에서 매일 숯만 씻었다.
며칠을 씻자 냇물이 까맣게 변했다.
이상하게 여긴 마을 사람들이 저승사자에게 왜 숯을 씻느냐고 물었다.
사자는 “검은 숯을 씻어 하얗게 만들려고 한다”고 답했다. 그러자 뒤에 있던 동방삭이 말했다.
“내가 3000년을 살았지만 숯을 씻어서 희게 만들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소”
이 말을 들은 사자는 기다렸다는 듯이 동방삭을 데리고 저승으로 갔다는 이야기다.

양재천은 과천 관악산에서 발원하여 서쪽에서 동쪽으로 흘러내리는 역수(逆水)다.
양재천은 개포동을 지나 그 끝자락에서 탄천을 만나 북쪽으로 흘러 한강을 만난다.
옛날 이 지역은 서울과 근거리이긴 하나 교통이 불편하여 나룻배를 타고 서울로 갔다 오는 산골이었다.
숯을 만들어 서울에 공급하여 숯골이란 지명이 생겨났을 것이라고 한다.
숯골(염리)은 현재의 성남경찰서 주변을 아랫 숯골이라 했다.
태평동, 신흥동, 수진동 일부를 윗숯골이라 했다. 아랫 숯골은 의령 남씨의 세거지였다.
윗숯골은 풍양조씨가 원주민으로 현재까지 9대째 살고 있다.
또한 본관이 광주이며 사후 영의정에 추증된 청백리 이지직(1354-1419)선생의 호가 탄천이다.
탄천은 순수한 우리말로 '숯내'라고도 한다. 맑고 푸른 물이 흐르는 큰 하천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한양의 목장성 살곶이목장

한강이야기 2012. 4. 30. 21:49 Posted by 조영희

 아차산에는 국립목장을 두르는 목장성을 있었다.
바로 국립목장 사복시(司僕寺) 살곶이목장이 아차산에 있었던 것이다.
조선 초기 태조와 태종 때부터 아차산 서쪽 기슭은 사냥터로 각광을 받았다.
역대 왕들은 뚝섬에 마련한 성덕정(聖德亭)과 화양정(華陽亭)에서 기마 군사들의 열무행사를 관람하였다. 아차산 서쪽 기슭의 국립목마장은 일명 살곶이목장이라고 한다.
태조 이성계는 왕자들 간의 골육상쟁(骨肉相爭)을 보고 환멸을 느껴 왕위를 내놓고 고향인 함흥으로 갔다. 정종도 2년 만에 임금의 자리를 내놓고 물러나자 태종이 왕위에 올랐다.
태종은 이복 동생들을 죽이고 왕의 자리에 올랐다는 세상의 이목을 생각하여
부친인 태조에게 국왕으로 인정받고 싶어하였다. 태조를 서울로 모셔 오지 않을 수 없었다.


태조 이성계를 모시러 신하를 함흥으로 보내면 태종의 행실을 노엽게 생각하는 태조 이성계는
사신이 올 적마다 죽였다고 한다. 이때부터 심부름을 보낸 뒤 돌아오지 않거나
소식이 없는 경우 ‘함흥차사(咸興差使)’라는 고사성어(古事成語)가 생겼다.
무학대사가 태조 이성계를 설득하여 서울로 모셔 오게 되었다.
태종은 태조 이성계가 서울로 돌아오자 동교(東郊), 지금의 살곶이벌에서 환영 연회를 열도록 하였다.
이때 하륜(河崙)은 연회장에 큰 차일을 칠 때 굵고 긴 기둥을 여러 개 세워 놓도록 건의하였다.
태조 이성계를 모시고 태종이 인사를 드리려 하니 갑자기 태조 이성계가 태종에게 활을 쏘았다.
태종은 굵은 기둥을 안고 요리조리 피하여 화를 면하였다.
태종이 술잔을 드리는데 하륜의 말을 쫓아 신하를 시켜 잔을 올리게 하였다.
“모두 천명(天命)이로다.”
태조가 소매 속에서 철퇴를 꺼내며 장탄식을 했다.
이 부근을 살곶이들(箭串坪)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중종반정이 일어나던 해인 연산군 12년(1506).
젊어서 서울에 역군(役軍)으로 올라왔던 어느 노인이 연산군이 살곶이다리에 거둥할 때의 회고담이다.
"나는 일곱살에 군보(軍保)에 소속되어 13세 때 비로소 서울에 번(番)을 들었는데,
그 때는 연산군이 황음해서 날마다 노는 것만 일삼았다.
연산군의 얼굴을 쳐다보니 얼굴빛이 희고 수염이 적으며 키는 크고 눈에는 붉은 기운이 있었다.
연산군이 살곶이다리에 거둥할 때 나는 역군(役軍)으로 따라갔다.
화양정 앞에 목책을 세우고 각읍에서 기르던 암말 수 백마리를 이 목책 안에 가두었다.
연산군이 정자에 자리를 잡자 수많은 기생만이 앞에 가득하고 시신(侍臣)들은 물리쳤다.
이어서 마관(馬官)이 숫말 수백 마리를 이 목책 안에 몰아넣으므로서 그들의 교접하는 것을 구경하는데
여러 말이 발로 차고 이로 물면서 서로 쫓아 다니는 그 소리가 산골짜기를 진동하였다.
그 해 가을에 중종반정이 있었다."


 

서울 도성 동쪽 들판 살곶이벌

한강이야기 2012. 4. 30. 21:16 Posted by 조영희

 아차산은 그리 높지도 빼어나지는 않다. 그래도 서울의 명산이다.
도성의 동대문 밖으로는 그 명산 아차산까지 넓은 들 살곶이벌이 펼쳐졌다.
살곶이벌은 동쪽에서 서쪽로 흐르는 한강과 북쪽에서 남쪽으로 흘러드는 중랑천이 만나는 곳에 큰 벌판이다.태조 이성계가 도읍지를 정하기 전 한양의 지리를 살필 때이다.
그는 서울 도성 동쪽 벌판 동교에 나아가 매를 놓아 사냥을 즐겼다.
이 때 응봉에서 활을 쏘자 화살을 맞은 새가 중랑포의 살곶이목장에서 기르는 말의 음료로 사용했던
도요연(桃夭淵)에 떨어졌으므로 그 자리를 살곶이라 하였다는 전설도 있다.
이 후로 새가 떨어진 곳을 ‘살곶이’ 그 주변 벌판을 ‘살곶이벌' '전관평(箭串坪)’이라 부르게 되었다.
옛부터 살곶이벌은 관중 관교 동교 등으로 불리어져 왔다.
이곳은 자연히 평야가 형성되어 풀과 버들이 무성했으므로 조선 초부터 말을 먹이는 목장이 되었다.
또한 임금의 매 사냥터로도 두드러진 곳이어서 ’동교수렵(東郊狩獵)이란 말을 남기기에 이르렀다.

 태조 이성계는 즉위 3년 아직 한양에 도읍을 정하기 전에 한양의 지리를 살필 때 동교 살곶이벌에 나가 매를 놓아 사냥을 즐겼다. 이때 응봉에서 활을 쏘았던 바 화살을 맞은 새가 중랑천 도요연(桃夭淵: 뚝섬 벌 목장 말들의 음료로 사용했던 지금의 살곶이 다리 부근)에 떨어졌다.
그 자리를 ’살곶이’라 하였다는 것이다.
태조는 다음해 3월 한강 위 지금의 응봉 기슭에 매사냥을 관장하는 응방(鷹坊)을 설치하였다 한다. 조선 왕조 정부는 이 넓은 땅을 국립 목장으로 만들었다.
이 일대가 목장이 있었음을 알려주는 지명이 아직도 곳곳에 남아있다.
과거 마장(馬場)의 안 넓은 벌판이라고 일컬어지던 장안평이다.
마장동은 조선 초기부터 숫말을 기르던 숫말목장 양마장(養馬場)이 있었는데서 비롯된 지명이다.
제주도 같은 곳에서 어렵사리 말을 한양으로 운반해오면
암말은 지금의 자양동(雌養洞: 옛이름 雌馬場里)으로 보냈다.
암말을 키우는 자마장동(雌馬場洞)이 훗날 자양동으로 바뀐 것이라고 한다.
목장 맞은편이라는 뜻의 동네 이름이 바로 면목동이다.

한양대학교 캠퍼스에는 말의 안녕을 비는 마조단(馬祖壇)의 터가 있다.
과거의 중요한 교통수단 중의 하나는 바로 말이었다. 국가적인 차원에서 말을 기르는 목장을 설치하기도 했다. 또한 말을 위해 왕이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왕이 말을 위해 제사를 지내던 곳이 바로 마조단이다.
마조단은 말의 돌림병을 예방해 달라는 목적으로 말의 조상인 천사성(선목, 마사, 마보)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마조단의 기원이 어느 때인지를 나타내는 문헌상의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고려시대부터 말의 돌림병을 예방하기위한 제사가 있었다. 고려 초기 마조단의 규모는 너비가 9보, 높이가 3자이며 사방에 출입하는 층계가 있었다. 길일(吉日)에 임금이 제사를 지냈다. 조선시대에도 이 풍습이 답습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조선시대에 어느 왕 때 마조단을 쌓았는지는 알 수 없다. 1894년 갑오개혁 이후 옛 풍습을 타파하는 정책에 따라 마조단의 제사도 순종 2년(1908)에 폐지되었다.



 

아차산 보루터에서는 서울을 감싸고 도는 한강과 중랑천이 한 눈에 들어온다.
한내 중랑천 주변 너른 들판는 아주 이른시기에  서울의 문명이 싹튼 곳이다.
한북정맥으로 이어온 망우산 봉화산과 아차산이 한양의 외청룡으로
서울의 동쪽을 병풍처럼 지켜주며 자양동 한강 앞에서 멈춘다.
그 산 기슭에는 한내  중랑천이 흐르고 있다. 가장 이른시기 구석기시기의 문명이 거기에 있었다.
망우산을 중심으로 삼각점이 되는 봉화산과 용마산 지역에 구석기·청동기 시대의 각종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이 지역에서 출토된 유물은 경희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조사된 서울시 유일의 구석기시대 유적이다. 면목동 구석기 유적은 한강 서울 유역에서 발견된 유일한 구석기 유적이다.
중랑구 면목동의 아차산 서쪽 사면 끝 기슭 면목고등학교 인근의 산기슭에 해당된다.
유적의 앞쪽으로 중랑천을 배경으로 한 들판이 펼처있어
구석인들의 일시적인 생활주거지로 좋은 여건을 형성하고 있다.
유적의 입지적 조건은 뒤에 산을 등지고 앞이 트였으며 중랑천이 이루어 놓은 들이 눈 앞에 트인 곳이었다. 유적에서는 타제석기만 출토되었다.
채집된 석기는 대부분이 몸돌석기이며 몇 개의 큰 격지석기도 끼어 있다.
특히 상봉동 봉수대에서 면목동에 이르는 지역에는 1960년대까지만 해도 토성의 흔적이 남아 있어서 후기 청동기시대 초기 철기시대의 성읍국가였음을 알 수 있다.

서울 중랑천은 한강의 여러 지류중 하나다.
경기도 양주시에서 발원해 의정부시를 거쳐 서울특별시 성동구 금호동과 성수동 1가의 강변북로 다리에서 한강과 합류하는 하천이다. 경기도부분의 중랑천은 지방하천으로 분류되며 서울특별시에 접어들면 국가하천으로 등급이 바뀐다. 또 동부간선도로 강북 구간이 서울특별시 구간부터 중랑천과 나란히 뻗어있다. 중랑천의 위치와 옛날 중랑천은 길이 20km. 최대너비 150m. 유역면적 288㎢.
큰 내 한천 중랑천은 총13개의 지류를 지니며, 총길이는 45.3㎞나 되는 서울의 어느 하천보다도 길다.중랑천 주변은 높이 348m의 용마산을 비롯하여 280m의 망우산, 177.9m의 구릉산,
137.9m의 봉화산 등이 오랫동안 침식을 받아서 산맥이 낮아진 구릉지로 형성된 곳이다.
백제시조 온조는 졸본지역에서 한강 유역인 위례성에 도읍을 정했다.
노중국 교수(계명대 사학과)는 한강유역의 첫 도읍은 중랑천 근처라고 주장한다.
졸본(환인지방)을 출발한 온조 일행은 개마고원을 넘어 원산지역으로 내려와
그 곳에서 추가령구조곡을 타고서 한강유역에 이른 것같다. 그때가 기원전 18년이다.
이때 온조 일행이 백제 최초의 왕성 하북위례성 터를 잡은 곳이 중랑천 주변이라는 것이다.
오늘날 서울 동대문구 중랑구 성동구 일대 중랑천변이 하북위례성이 들어섰던 곳이라는 주장이다.
“하북위례성의 옛 자리는 경성 동북쪽 십리되는 곳 삼각산 동록(東麓)에 있다.”
다산 정약용(1762~1836년)이 그의 저서 <여유당전서> ‘강역고’에서 주장한 내용이다.
삼각산 동쪽 기슭을 세검정 계곡 일대로 해석하는 학자도 있다.
 "내 생각은 지금의 서울 청계천을 끼고 있는 중랑천 청계천을 끼고 있는 지금의 수도 위치가 아닌가.고려시대 때도 남경은 바로 그 한양부라는 데가 바로 지금의 도성 안에 있었기 때문에
옛날 도성이었던 데서 계속 성장 발전했다고 생각되지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다고 생각돼요.
지금 부아악이라는 것도 북악산이라고 한다면 청와대 뒷산인데
바로 그 지역이 아니었는가 하북위례성이."<이형구선문대교수>
<삼국사기>에는 백제의 온조가 재위 14년에 낙랑과 말갈의 잦은 침략을 피해서 하북위례성에서
한수의 남쪽인 한산 아래 하남위례성으로 천도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위례성을 중랑천 주변에서 하남으로 옮긴 것은 천도로 보기 어렵다는 주장이 나온다.
"중랑천이나 세검정에 둔 하북위레성에서 바로 코앞의 하남으로 도읍지를 옮긴 것을 두고
천도라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문화재연구소에서 고구려의 적석총 무덤이 발굴된 한탄강 유역이
오히려 하북위레성일 가능성이 높다."(임영진 전남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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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녀 '중랑' 한내서 만나다.

전설 2012. 4. 30. 20:59 Posted by 조영희

서울의 중랑천이다.
옛날 중랑천은 도봉동 부근에서는 서원천 상계동 부근에서는
‘한강의 새끼 강’ 이라는 뜻으로 ‘샛강‘이라고 불리웠다.
한강의 위쪽에 흐르는 냇물이라는 뜻으로 “한천, 한내”라고도 했다.
최욱래 한양대 교수(국문학)가 전하는 중랑천의 전설이다.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 조성할 때이다. 능역에 백성들의 동원령이 떨어졌다.
근처 면목동에 사는 병든 노인도 동원령을 받았다.
그 노인에게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아버지 제가 대신 능역에 나가겠어요.”
나이 어린 딸 ‘중랑‘이 자청하고 나섰다.
그 중랑은 남장으로 낮에는 능역에 참여하하였다.
그는 낮에는 능역에 일을 하였고 밤에는 아버지는 병간호를 하며 정성껏 모셨다.
공사가 끝날 무렵 중랑이는 최우수 일꾼으로 선발되어 표창을 받게 되었다.
그는 표창식 직전 건원릉을 도망쳐 나왔다. 남자로 변복을 한 일이 발각될 것이 두려웠다.
관리들은 중랑이를 추격했으나 중랑이는 이를 따돌린다.
관리들은 한내 물가에 빨래하고 있던 처녀에게 물었다.
그 처녀는 모른다고 시치미를 떼었다.
“바로 네가 능역을 하다 도망친 그 놈이지!”
군졸대장이 그 처녀에게 따져 물었다.
그는 도망쳐 집에서 남장을 여자의 옷으로 갈아 입고 한내로 나와 빨래를 하고 있었다.
그대로 신고온 짚신에 묻은 황토를 다 씻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발각된 것이다.
정부는 중랑이의 속 사정을 듣고 후하게 상을 주었다고 한다.
그 중랑이의 충효의(忠孝義)를 높이 사서 표창하고
한내를 중랑의 이름을 따서 ‘중랑천’이라고 명명했다고 한다.
옛날 옛날 어느 옛날.
서울에서 전국 장사모임이 열리게 되었다. 
뒤늦게 이 소식을 들은 경상도 장사가 허겁지겁 짐을 꾸려
서울로 가던 도중 집으로 돌아가는 강원도 장사를 만났다.
  "서울의 도성문을 닫을 시간이 다 되었고 여기까지 오느라 기운이 빠졌을테니
그냥 집으로 돌아가라 "  강원도 장사가 말하는 것이었다.
경상도 장사는 그 말을 듣지 않고 더욱 서둘러 길을 재촉하였다.
상봉동까지 왔을 때는 갈증이 나 더 이상 발을 옮길 수 가 없었다.
때마침 옆으로는 중랑천이 흐르고 있었고  그 물을 마시기 위해 바위에 몸을 기대 엎드렸다.
물이 별로 흐르지도 않거니와 짚었던 바위에 손과 무릎의 자국이 깊게 패여져 있는 게 아닌 것인가. 아마도 바로 직전에 강원도 장사가 물을 마시고 갔나보다 생각하고
목을 축일 정도의 물만 마시고 일어서려 했다.
  "저 사람이 냇물을 모두 마셔 농사를 지을 수 없음은 물론이고 식수마저도 없어져 버렸으니
이는 분명 사람이 아닌 요물임이 틀림없다"
갑자기 포졸을 앞세운 마을 사람들와서는 애워싸는 것 이었다.
"나는 요물이 아니고 사람이며 내가 오기 전에 강원도에서 온 장사가 먼저 거의 모든 물을 마시고
남은 물을 조금 마셨는데 그것도 죄가 되느냐"
경상도 장사는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그는 관아로 끌려가 버리게 되었다.
 "내 한이 물을 말려 사람이 살 수 없는 검은 땅으로 만들어 버릴 것이며 
중랑천은 해마다 홍수로 넘쳐흘러 농사가 망치게 될 것이다'
매일 모진 고문을 받은 그는  죽음을 직전에 이런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그 후 해마다 중랑천은 범람하였고 엎드려 자국이 생긴 바위가 있던 마을 일대는
검은 가루가 날리는 곳으로 바뀌게 되었다고 한다. 
 

각하, 시원하시겠습니다."

한강이야기 2012. 4. 22. 08:44 Posted by 조영희

아차산 앞쪽으로 자리잡고 있던 광나루에서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면서 아차산을 바라보던 광경은 한 폭의 그림과 같다.겸재 정선의 그림 광진에 보면 층층이 쌓인 아차산 아래로 고관들의 별장들이 즐비한 것을 볼 수 있다.아차산 자락 광장동 일대는 이미 조선시대부터 명사들이 자주 찾던 명승지였음을 알 수 있다.
1950년대까지만 해도 한강변에서 가장 아름다운 명소로 이승만 대통령의 별장이 위치해 있었다.
지금은 세라톤 워커힐 호텔이 들어선 곳이다. 1950년대까지도 한강변에서 가장 아름다운 명소로 존재하였던 아차산 자락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별장이 있었다.
"1961년 하반기 대규모 호텔을 조성할 곳으로 이승만 대통령의 한강변 별장터가 선정됐다.
부지 면적은 19만1천여평. 이대통령은 가끔 이곳에 들러 낚시를 즐겼다고 한다.
울창한 아차산을 등진 이곳은 한강의 흐름과 넓은 들녘이 한눈에 들어오는 절경이었다."
(손정목 서울시립대 명예교수)
많은 이들이 아차산과 광나루 일대의 풍광을  그림과 시로 읊기도 하였다.
근현대 이후에 서울로 인구가 집중되면서  아차산 기슭 중턱까지 주택이 들어서게 되었다.

이승만대통령은 낚시를 즐겼다.
휴가때 진해 별장이나 화진포 별장에서 낚시하는 이승만대통령부부의 사진을 볼 수 있다.
이 사진은 별장에서 이대통령이 낚시하는 모습이다.

"각하, 시원하시겠습니다."
유옥우 의원의 1956년 국회발언에서 나온 말이라고 한다.
“이승만대통령이 광나루에서 특별선박을 내어 낚시질을 할 때 방귀를 뀌자
당시 경기도지사였던 이익흥 내무장관인 ‘각하 시원하시겠습니다’라고 말했는데,
아부질 잘하는 그런사람이 대통령을 보필을 하고 장관노릇을 한다고 하면 대한민국 명의가 서겠느냐!”
이 승만대통령의 눈을 가리고 귀를 막아 인의 장막을 치고 아부와 과잉충성이 극심했던 시절이다.
그로부터 <각하 시원하시겠습니다.>라는 이 말은 이승만대통령에게 아부하는 사람들의 본질을 드러내는 말로 널리 쓰였다.

이익흥내무장관과 관련한 기사를 찾아 볼 수 있었다.
<정운현의 역사에세이>에서 이익흥내무과 관련한 내용과 사진을 그대로 옮겨본다.
"오랜만에 자료 파일을 뒤적여 수 년 전 고서점에서 구입한 전단지 가운데 하나를 찾아냈습니다.
손바닥만한 크기의 이 전단지는 말하자면 ‘초대장’입니다.
행사 일시는 1955년 6월 15일, 장소는 남한산성 서장대, 초청자는 당시 경기도지사로 있던 이익흥(李益興)입니다. 주최측은 이날 교통 편의를 위해 당일 12시 30분 정각에 경기도청 정문 앞에 버스를 준비해뒀습니다.
그리고 참석자는 당일 이 전단지(사실상 초대장)를 지참하고 참석하랍니다.
대체 무슨 행사길래 남한산성에서 행사를 열었으며, 또 초청자가 경기도지사였을까요?
<대한뉴스> 제59호(1955년 7월 4일 제작)에 따르면, 이날 행사는 ‘이승만 대통령의 송수탑 건립과 제막식’이었습니다. <대한뉴스>는 6월 15일 오후 ‘유서 깊은 남한산성에서 일각’에서 이승만 대통령 송수탑 제막식이 성대히 열렸다고 보도했습니다.

이날 행사장에는 함태영 부통령 및 정부각료, 내빈들 참석했으며 변영태 외무부장관과 내외 요인들이 축사를, 송수탑 건립위원장인 이익흥 경기도지사의 송수탑 건립 경과보고를 했습니다.
이어 인천여고 학생들이 이승만 대통령의 만수무강을 비는 합창을 했다고 보도했더군요."
실제로 이승만 대통령의 권위로 인해 주변에는 아첨꾼들이 들끓었다.
당시 이승만대통령에게 아부하는 것을 빗대 '사바사바'라는 일본어가 회자되었다.
지금도 아부의 표현으로 일반 국민들 사이에서 여전히 '사바사바'가 통용되고 있기도 한다.

 

 

서울 강(京江 Seoul River)

한강이야기 2012. 4. 7. 20:55 Posted by 조영희

 

한강은 태백산과 금강산에서 발원하여 서해까지 이르는 긴 강, 한강이다.
한강은 한반도의 한복판을 흐르면서 한반도 역사의 중심 무대가 되었다.
한강 전체 물길 중에서 서울을 끼고 도는 부분을 특히 '경강(京江)'이라 불렀다.
한양 도성 앞을 흐르는 강을 서울강(京江 Seoul River) 이라고 했다.경강은 총길이 514㎞인 한강 중 한성부가 관장하던 곳이다. 한양의 외청룡 아차산이다. 그 아차산 자락 한강나루가 광나루 광진이다.

광나루 광진에서 양화진까지의 한강을 서울강 경강이라고 한 것이다.그 경강은 동호 한강 서강 용산강 마포강 행호 등으로 달리 불리었다.경강은 조선후기 전국 해상 수상 교통과 운송의 중심지이었다. 전국에서 몰려드는 각종 물화를 서울로 공급하는 창구 역할을 했다. 남한강과 북한강이 양수리에서 만난다. 한강 윗쪽이 북으로 왼쪽 동쪽 은 외사산 외청룡 아차산으로 이곳을 흐르는 이 한강의 본류를에 있는 산이 한양의 외청룡 아차산이다.아차산 동쪽 끝자락에 광나루터가 있었다.

경강은 18세기 이전까지 3강으로 불리었다. 한강 용산강 서강이 한양의 기본 3강이었다. 남산 남쪽 한남대교 근처에서 노량진까지를 한강, 그 서쪽에서 마포까지를 용산강, 마포 서쪽에서 양화진까지를 서강이라 불렀다. 이들 3강은 조선전기부터 경강수운의 중심지이었다.조운에 의한 세곡 운송의 거점이면서 동시에 서울과 다른 지역을 연결하는 나루터로서 중요 교통로에 해당하였다.지금의 한남대교 부근에서 노량진까지를 가리키는 한강지역에 속하는 두모포에서는 한강 상류에서 내려온 물자가 집하(集荷)되어 서울로 반입되었다. 두모포 아래에 위치한 한강진(구철 한남역 자리)은 경기도 광주로 건너갈 수 있는 나루터로서 서울의 물화가 삼남지역으로 내려가는 중요한 길목이기도 했다. 남서쪽에서 마포까지를 가리키는 용산강 지역은 경기도, 충청도, 강원도, 경상도 등지의 세곡을 모아 한강 수운을 따라 상류에서 실어온 다음 부려 놓는, 내륙수운에 의한 조운의 종착점이었다. 한편 조선전기에는 바닷물이 용산강까지 들어왔기 때문에
서해를 통해 올라온 조운선까지 모여들어 이곳은 조운의 중심지로서 조선초기부터 발전하였다. 그러나 조선후기에는 용산강의 수위가 점점 낮아지고 강바닥에 진흙이 쌓여
바닷물이 들어오지 않게 되어 서해를 통해 올라온 조운선 역시 용산강 하류인 마포나 서강까지만 들어오게 되었다. 한편 용산강의 하류에 위치한 마포는 서해안과 한강 상류를 연결하는 상업의 요지였다. 서강과 용산이 조세곡 운송의 중심지였다면 마포에는 세곡이 아닌 일반 상품들이 집하(集河)되어 매매되었기 때문에 이곳은 어물과 상품유통의 중심지로서 번창하였다.마포서쪽에서 양화진에 이르는 서강지역은 바다를 통해 경강으로 반입되는 황해도, 전라도, 충청도, 경기도 등지의 세곡이 모이는 곳이었다. 서해를 거쳐 운송된 조세곡은 일단 서강에서 하역되었다가 배나 짐말, 짐꾼에 의해 다시 경강변이나 도성 안의 각 창고로 운반되었다. 조선후기에는 조운선이 용산강까지 올라갈 수 없었기 때문에 서강지역이 세곡운송의 중심포구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18세기 중엽부터 5강으로 불린 경강지역은, 한강 서강 용산 마포 망원정이었고 18세기 후반 이후의 8강에는 5강의 두모포, 서빙고 뚝섬이 더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