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차산에는 국립목장을 두르는 목장성을 있었다.
바로 국립목장 사복시(司僕寺) 살곶이목장이 아차산에 있었던 것이다.
조선 초기 태조와 태종 때부터 아차산 서쪽 기슭은 사냥터로 각광을 받았다.
역대 왕들은 뚝섬에 마련한 성덕정(聖德亭)과 화양정(華陽亭)에서 기마 군사들의 열무행사를 관람하였다. 아차산 서쪽 기슭의 국립목마장은 일명 살곶이목장이라고 한다.
태조 이성계는 왕자들 간의 골육상쟁(骨肉相爭)을 보고 환멸을 느껴 왕위를 내놓고 고향인 함흥으로 갔다. 정종도 2년 만에 임금의 자리를 내놓고 물러나자 태종이 왕위에 올랐다.
태종은 이복 동생들을 죽이고 왕의 자리에 올랐다는 세상의 이목을 생각하여
부친인 태조에게 국왕으로 인정받고 싶어하였다. 태조를 서울로 모셔 오지 않을 수 없었다.
태조 이성계를 모시러 신하를 함흥으로 보내면 태종의 행실을 노엽게 생각하는 태조 이성계는
사신이 올 적마다 죽였다고 한다. 이때부터 심부름을 보낸 뒤 돌아오지 않거나
소식이 없는 경우 ‘함흥차사(咸興差使)’라는 고사성어(古事成語)가 생겼다.
무학대사가 태조 이성계를 설득하여 서울로 모셔 오게 되었다.
태종은 태조 이성계가 서울로 돌아오자 동교(東郊), 지금의 살곶이벌에서 환영 연회를 열도록 하였다.
이때 하륜(河崙)은 연회장에 큰 차일을 칠 때 굵고 긴 기둥을 여러 개 세워 놓도록 건의하였다.
태조 이성계를 모시고 태종이 인사를 드리려 하니 갑자기 태조 이성계가 태종에게 활을 쏘았다.
태종은 굵은 기둥을 안고 요리조리 피하여 화를 면하였다.
태종이 술잔을 드리는데 하륜의 말을 쫓아 신하를 시켜 잔을 올리게 하였다.
“모두 천명(天命)이로다.”
태조가 소매 속에서 철퇴를 꺼내며 장탄식을 했다.
이 부근을 살곶이들(箭串坪)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중종반정이 일어나던 해인 연산군 12년(1506).
젊어서 서울에 역군(役軍)으로 올라왔던 어느 노인이 연산군이 살곶이다리에 거둥할 때의 회고담이다.
"나는 일곱살에 군보(軍保)에 소속되어 13세 때 비로소 서울에 번(番)을 들었는데,
그 때는 연산군이 황음해서 날마다 노는 것만 일삼았다.
연산군의 얼굴을 쳐다보니 얼굴빛이 희고 수염이 적으며 키는 크고 눈에는 붉은 기운이 있었다.
연산군이 살곶이다리에 거둥할 때 나는 역군(役軍)으로 따라갔다.
화양정 앞에 목책을 세우고 각읍에서 기르던 암말 수 백마리를 이 목책 안에 가두었다.
연산군이 정자에 자리를 잡자 수많은 기생만이 앞에 가득하고 시신(侍臣)들은 물리쳤다.
이어서 마관(馬官)이 숫말 수백 마리를 이 목책 안에 몰아넣으므로서 그들의 교접하는 것을 구경하는데
여러 말이 발로 차고 이로 물면서 서로 쫓아 다니는 그 소리가 산골짜기를 진동하였다.
그 해 가을에 중종반정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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