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7년 2월 동궁
“세자 저하!”
“누가 들어왔느냐? 들어오도록 하라!”
“신, 악공 이오방이옵니다.”
“오늘은 연회도 없는 데 악공인 네가 어인 일로 왔느냐?”
“세자 저하! ‘어리라는 여인의 이름을 들어 보았습니까?”
“어리라니? 어리가 누구인데 그 이름을 나에게 물어 보는 것이냐?
“중추부사를 지낸 곽선의 첩이온데 한양 천지에서 비교할 여자가 없을 만큼 자색이 뛰어날 뿐만아니라
재예(才藝)까지 겸비하고 있다는 소문이 장안에 파다하옵니다.”
“그래? 흐음,그렇다면 내가 어리라는 여자를 만나야겠구나.
네가 말을 꺼냈으니 당장 나가서 그 여자를 도모하도록 하라.“
“그리 하도록 하겠습니다.”
태종의 큰 아들 세자 양녕대군 이제가 악공 이오방을 만나 은밀한 대화를 나눈다.
양녕대군 이제가 세자의 자리에서 쫓겨나게 되는 비극은 이렇게 시작된다.
어리라는 여인은 곽선의 첩이었다. 엄연한 유부녀이었다.
악공 이오방의 은밀한 공작은 결코 쉽지 않았다. 이오방의 제안을 어리가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오방은 세자에 알려서 수를 놓은 비단 주머니를 선물로 주어 회유하였다.
그래도 어리는 쉽게 응하지 않았다. 어리는 곽선의 양자인 이승의 집에 찾아가서 이 일을 알렸다.
그리고 그 집에 남아 며칠간 유숙하였다. 이때 또다른 악공인 이법화가 달려가 세자에게 알리면서
이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부추겼다.
세자가 어린 환관을 데리고 대궐 담을 넘어서 이오방의 집으로 간 뒤 드디어 이승의 집에 이르렀다.
“늦은 시각에 누구요?”
“쉬이잇. 조용히 하시오. 세자 저하가 왕림하시었소.”
“아니, 세자 저하가 어찌 소인의 집에 까지....”
“어리가 이 집에 왔다는 것을 알고 찾아왔소.”
“어리는 제 양부의 첩인데... 아무리 세자 저하라고 하여도 만나게 하여 드릴 수 없습니다.”
“세자인 내가 직접 청하여도 정녕 못 만나게 하겠다는 것이냐?
어리가 있는 방으로 안내하라.”
이승이 처음에 고분고분하지 않았다. 세자가 엄포를 놓고 강요하자 어리를 만나게 해주었다.
드디어 세자는 어린 환관 이법화의 집으로 데리고 가서 하룻밤을 자고 다음날 궁중으로 납치하였다.
이 사건은 양녕대군 이제를 세자의 자리에서 쫓겨나게 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