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도성 동쪽 들판 살곶이벌

한강이야기 2012. 4. 30. 21:16 Posted by 조영희

 아차산은 그리 높지도 빼어나지는 않다. 그래도 서울의 명산이다.
도성의 동대문 밖으로는 그 명산 아차산까지 넓은 들 살곶이벌이 펼쳐졌다.
살곶이벌은 동쪽에서 서쪽로 흐르는 한강과 북쪽에서 남쪽으로 흘러드는 중랑천이 만나는 곳에 큰 벌판이다.태조 이성계가 도읍지를 정하기 전 한양의 지리를 살필 때이다.
그는 서울 도성 동쪽 벌판 동교에 나아가 매를 놓아 사냥을 즐겼다.
이 때 응봉에서 활을 쏘자 화살을 맞은 새가 중랑포의 살곶이목장에서 기르는 말의 음료로 사용했던
도요연(桃夭淵)에 떨어졌으므로 그 자리를 살곶이라 하였다는 전설도 있다.
이 후로 새가 떨어진 곳을 ‘살곶이’ 그 주변 벌판을 ‘살곶이벌' '전관평(箭串坪)’이라 부르게 되었다.
옛부터 살곶이벌은 관중 관교 동교 등으로 불리어져 왔다.
이곳은 자연히 평야가 형성되어 풀과 버들이 무성했으므로 조선 초부터 말을 먹이는 목장이 되었다.
또한 임금의 매 사냥터로도 두드러진 곳이어서 ’동교수렵(東郊狩獵)이란 말을 남기기에 이르렀다.

 태조 이성계는 즉위 3년 아직 한양에 도읍을 정하기 전에 한양의 지리를 살필 때 동교 살곶이벌에 나가 매를 놓아 사냥을 즐겼다. 이때 응봉에서 활을 쏘았던 바 화살을 맞은 새가 중랑천 도요연(桃夭淵: 뚝섬 벌 목장 말들의 음료로 사용했던 지금의 살곶이 다리 부근)에 떨어졌다.
그 자리를 ’살곶이’라 하였다는 것이다.
태조는 다음해 3월 한강 위 지금의 응봉 기슭에 매사냥을 관장하는 응방(鷹坊)을 설치하였다 한다. 조선 왕조 정부는 이 넓은 땅을 국립 목장으로 만들었다.
이 일대가 목장이 있었음을 알려주는 지명이 아직도 곳곳에 남아있다.
과거 마장(馬場)의 안 넓은 벌판이라고 일컬어지던 장안평이다.
마장동은 조선 초기부터 숫말을 기르던 숫말목장 양마장(養馬場)이 있었는데서 비롯된 지명이다.
제주도 같은 곳에서 어렵사리 말을 한양으로 운반해오면
암말은 지금의 자양동(雌養洞: 옛이름 雌馬場里)으로 보냈다.
암말을 키우는 자마장동(雌馬場洞)이 훗날 자양동으로 바뀐 것이라고 한다.
목장 맞은편이라는 뜻의 동네 이름이 바로 면목동이다.

한양대학교 캠퍼스에는 말의 안녕을 비는 마조단(馬祖壇)의 터가 있다.
과거의 중요한 교통수단 중의 하나는 바로 말이었다. 국가적인 차원에서 말을 기르는 목장을 설치하기도 했다. 또한 말을 위해 왕이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왕이 말을 위해 제사를 지내던 곳이 바로 마조단이다.
마조단은 말의 돌림병을 예방해 달라는 목적으로 말의 조상인 천사성(선목, 마사, 마보)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마조단의 기원이 어느 때인지를 나타내는 문헌상의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고려시대부터 말의 돌림병을 예방하기위한 제사가 있었다. 고려 초기 마조단의 규모는 너비가 9보, 높이가 3자이며 사방에 출입하는 층계가 있었다. 길일(吉日)에 임금이 제사를 지냈다. 조선시대에도 이 풍습이 답습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조선시대에 어느 왕 때 마조단을 쌓았는지는 알 수 없다. 1894년 갑오개혁 이후 옛 풍습을 타파하는 정책에 따라 마조단의 제사도 순종 2년(1908)에 폐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