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문신 박태보가 귀양간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거리 거리는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루었다.
조선 제일의 충신의 얼굴을 한번이라도 보겠다는 것이었다.
박태보는 숙종 때 문신으로 왕이 장희빈을 불러들여 왕비를 삼고 인현왕후 민씨를 폐출할 때
정면으로 간하다가 잡혀 참혹한 형벌을 받고 죽은 조선의 대표적인 선비이다.
종묘 제향에 향로를 반드는 봉로관이 되었을 때 으레 물수건으로 싸서 드는 법이건만
나랏일에 약간 뜨겁다고 싸서 들다니 말이 되느냐고 맨 손으로 들었다고 한다.
누릿한 냄새가 나기에 왕이 돌아다 보니
박태보의 향로든 손 끝이 타서 노란 연기가 오르는데
눈썹 하나 까딱 않더라는 그런 분이다.
 "너는 요놈 뜨거운 것 잘 참더구나"
숙종은 중전을 폐위하는 것을 간 했을 때도 친국하는 자리에서
인두를 달궈 단근질을 해서 역사상에 드문 참혹한 형벌을 가했다.
”세상에 저럴 수가!”
박태보의 짓이겨진 처참한 얼굴을 보고 사람들은 말문을 잃었다.
곳곳에서 통곡이 터져 나왔다.
남자들은 박태보의 가마를 서로 메겠다고 나섰다.
한강건너 노량진에 있는 사육신 묘지 부근에 다다랐을 때다.
박태보는 고문으로 생긴 상처가 터져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그는 아버지 '박세당'과 아들을 불렀다.
아버지와 아들은 한동안 말 없이 눈물만 떨구고 있었다.
그러더니 박세당이 아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너는 다시 회복될 것 같지 않구나.
여기서 조용히 죽어 네 충절을 나타내는 게 옳은 일이 아니겠느냐?”
박태보의 눈에서도 한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버님 분부대로 따르겠습니다.”
아버지 박세당이 울면서 한강을 건너는 것을
하염없이 지켜보던 박태보는 얼마 후 숨이 끊어졌다.
그의 마지막은 한 여인이 지켰다는 전설이다.
박태보는 어려서부터 슬기롭고 또 얼굴이 남중일 색(男中一色)이었다.
어느 날 참판 이종염(李宗燁) 집에 심부름하는 여인 하나가
그의 아름다운 모습에 반하여 박태보의 유모에게 이 사실을 알리자,
유모가 그 사정을 딱하게 여겼으나 박태보의 심지가 곧으므로
차마 입을 열어 볼 수가 없어 그의 모친에게 이야기를 해보았다.
그의 모친 역시 그 여인의 짝사랑을 동정하여
남편 서계(西溪) 박세당에게 아들을 좀 달래보라고 청하였다.
아버지 박세당이 박태보를 불러 여인에게 한을 남기면
앞으로의 길에 장애가 될 것이라 훈계하였다.
박태보도 부친의 뜻을 거역하지 못하였다.
그 여인은 박태보의 양친을 뵙고 스스로 머리를 쪽 지어 출가한 부녀처럼 하고 다녔다.
세월은 흘러 박태보는 그 뛰어난 재주로 벼슬길에 올랐고 여인은 그의 기억에서 차츰 멀어졌다.
숙종 15년(1689) 중전에 대한 장희빈의 끈질긴 모함이 성공하여
왕이 중전을 폐비하려 하자 직언(直言)을 잘 하던 박태보는 이 소식을 듣고
붓을 들어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진도로 귀양을 가게된다.
귀양지로 가는 길에 국문 시 입은 장독(杖毒)과 화상 (火傷)이 심해
친구 집에 있는 노량진에 머물렀다.
이때 어느 여인이 와서 박태보를 한번 뵈옵기를 청하였다.
방문객은 바로 전일에 박태보를 사모하여 혼례식도 올리지 않고
출가한 부녀자처럼 쪽을 지고 다니던 그 여인이었다.
박태보는 멀어져 가는 정신을 간신히 수습하여
겨우 손을 들어 여인의 손을 한번 꽉 잡은 다음 그만 목숨이 다했다.
여인은 그 앞에서 울고 또 울다가 일어나 나갔다.
그 후 인현왕후가 복위되고 노강서원이 완성되던 날,
그 여인은 소복을 입고 서원 뒤 서까래에 목을 매어 달아 싸늘하게 죽었다고 한다.

 

 옛날에는 한강 노들나루 근처 언덕으로 빼어난 경치를 자랑하던 명소였다.
세월이 흘러 그 언덕은 헐리고 절경을 뽐내던 강가 그 명소는 육중한 아파트군(群)에 자리를 내주었다.
아파트 동과 동 사이로 한강이 보이고 강 북녘에도 거대한 아파트가 버티고 시야를 가리고 있다.
청산 자부송(自負松)아 네 어이 누엇난다/
광풍을 못 이긔여 불희져저 누엇노라/
가다가 양공(良工)을 만나거든 날 옛다라 하고려/
조선 숙종 때 명신 박태보(朴泰輔)가 남긴 시(詩)이다.
옛 스타일의 그의 시를 현대문으로 바꾸어 보았다.
푸른 산 속에서 비뚜름하게 누워 있는 소나무야/
 어는 어찌해서 그렇게 누워 있느냐?/
사나운 바람을 못 이기어 뿌리가 뒤로 기울어져 누워 있다./
그러니 가다가 솜씨가 좋은 목수를 만나거든 내가 여기에 있다고 하여라!/

 1695년(숙종 21)에 지방 유림의 공의로 숙종 15년의 민비 인헌왕후 폐출 때
죽음으로써 이를 충간(忠諫)하였던 박태보(朴泰輔)다.
그를 기리기 위해 노들나루 근처 한강가 지금의 유원아파트 103동 앞에
노강서원을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그 자리에는 노강서원자리였음을 알리는 표석이 있다.
1697년에 조윤벽(趙潤璧) 등의 청액소(請額疏)로 ‘노강(鷺江)’이라 사액되었다.
1754년에 중건되었다.
노는 해오라기 노(鷺) 강은 큰내 강(江)으로
그가 세상을 뜬 노량진의 지명에서 서원의 이름을 따온 것으로 보인다.
대원군의 서원 철폐 당시 훼철되지 않고 남은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며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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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큰 홍수로 한강 물이 넘치는 바람에 노강서원이 물에 떠내려갔다.
그 뒤 6ㆍ25동란 때 소실된 것을 1968년 수락산 자락으로 옮겨 복원하였다.
1977년에 경기도 지방문화재로 지정받았다.
"전하께서는 마음대로 행하시나
하늘의 뜻을 거스르지 못할 줄을 왜 생각하지 못하십니까.
신은 이미 나라에 몸을 바쳤으니,
상소로 임금의 허물을 간하는 것은 신하의 마땅한 분수와 의리입니다."
강직하기로 이름난 박태보(朴泰輔)는  인현왕후를 궁궐에서 내보낼 때
그 옳지 않음을 상소하여 왕의 노여움을 산다.
그는 원래 타고난 성품이 대쪽같이 꼿꼿하였다.
그래서 결코 누구에든지 아첨하는 법이 없었다.
이런 성격을 미워하는 사람들의 시기와 참소가 끊이지 않았다.
왕의 신임은 두터웠다.
숙종에게는 늦도록 세자가 없었다.
임금의 마음이 초조하던 차에 소의 장씨(禧嬪張氏)가 왕자를 낳았다.
너무나 기다리던 왕자라서 숙종은 말없이 기뻐했다.
숙종은 곧 왕자를 책봉하고 장씨를 희빈(禧嬪)으로 올려 주려고 했다.
 "아직 왕후마마가 젊으시온데, 조금만 더 기다려 보시옵소서.
세자 책봉은 너무 이른 줄 아뢰옵니다."
"그러하옵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 보옵소서."
박태보가 반대하고 나섰다.
"허, 거 참! " 숙종은 이마를 찌프렸다.
임금으로서는 세자 책봉이 단 한 시간이라도 더 빨리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왕자를 낳은 장씨와 그 일가붙이들은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 설쳐 대기 시작했다.

임금의 총애를 한 몸에 받게 된 장씨 역시 하루가 다르게 방자해져 갔다.
장씨의 어머니는 가마를 타고 궁궐을 드나들고
미관말직에 있던 천한 직책의 친척들까지 모두 중요한 벼슬자리에 임명되었다.
뜻 있는 대신들은 모이면 걱정부터 하곤 했다.
“정말 위태로워서 못 보겠소이다. 꼭 무슨 일이 나고야 말 것 같아서 말이요.”
“중요한 직책은 모두 장씨 일가붙이니 나라 꼴이 어찌되려고 이 지경으로 되어 가는지......”
“목숨을 걸고 임금께 아뢰어 봅시다.”
“안되오 목숨이 열 개라도 살아남지 못하오. 조금만 더 두고 기회를 봅시다.”
숙종 임금은 여러 신하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이 장씨소생을 왕세자로 삼았다.
그때 반대한 많은 신하들은 모두 다 멀리 귀양을 보내졌다.
장희빈은 눈엣가시 같은 인현왕후
민비를 쫓아 내기 위해 임금에게 갖은 거짓말을 꾸며 댔다.
거짓말에 넘어간 숙종은 민비를 궁궐에서 쫓아내려고 신하들에게 의견을 물었다.
”왕비 민씨는 본래 투기심이 많아 국모의 자질을 갖추지 못하였소.
그런데 이번에 장희빈의 몸에서 세자가 탄생하자
더욱 모질고 악독하게 두 모자를 괴롭히고 있소.
 그런 성품으로는 하루도 국모 노릇을 할 수 없으니 당장 폐출시키시오! ”
인현왕후 민씨는 억울하게 궁궐에서 쫓겨났다.
”폐비 민씨에게 일체의 음식과 생활비를 지급하지 말도록 하라!”
임금의 추상같은 명령 때문에 민씨는 겨우 친정의 도움으로 끼니를 이어갔다.
왕비 폐출 사건이 옳지 않다는 상소가 나라 안 곳곳에서 올라 오기 시작했다.
80 여명의 신하들은 앞을 다투어 상소를 올렸다.
”감히 짐이 하는 일에 이렇듯 들고 일어서다니!
용서할 수 없다. 모두 잡아 들여라. 내가 친국 하겠다. “
마침내 박태보 차례가 되었다.
”내가 너를 유난히 신임했거늘 정녕 네가 이 상소문을 썼느냐?”
”그렇습니다.”
“왜 썼느냐?”
박태보는 고개를 꼿꼿이 들고 임금을 바라보며 말했다.
”임금과 신하의 관계는 어버이와 자식과의 관계와 같사옵니다.”
”물론 그렇다.” 숙종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비가 죄 없는 어미를 내치려 하는데,
어느 자식이 두 눈을 뜨고 가만히 구경만하고 있겠습니까?”
숙종은 버럭 화를 냈다.
”그토록 짐이 잘못 했다면 짐을 임금의 자리에서 쫓아 내면 될게 아니냐?”
”임금을 모함하고 죄인을 두둔하다니?”
박태보는 안타까운 눈빛으로 임금을 바라 보았습니다.
”요즈음 전하께서 후궁을 총애 하심이 너무 지나치시옵니다.
한두 사람의 말만 믿고 국모를 폐하려 하시니, 신하로서 어찌 마음이 아프지 않겠습니까?”
숙종은 소리를 버럭 질렀다.
”이 무엄한 놈! 발칙스럽구나. 저놈을 몹시 쳐라!”
형리들은 박태보에게 매를 내리치기 시작했다. 곧 살이 찢겨 피가 흘렀다.
그래도 박태보는 바른말을 쉬지 않았다.
”네 잘못을 알겠느냐?”
거듭 숙종이 다그쳤으나, 박태보는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정말 지독한 놈이구나? 어서 실토하지 못할까?”
”무엇을 실토하라 하십니까? 평범한 백성이라도 부부의 도리는 지극한 법인데
우리 국모가 어떤 분이시기에 상스러운 죄인으로 몰아 내치십니까?”
”저놈이 감히 나에게 충고를 하는구나.
저놈이 입을 열지 못하도록 불로 지질 형구와 무릎을 누를 형틀을 대령하렷다!”
갖은 형벌을 다 받으면서도 박태보는 할 말을 다 하였다.
”화형과 무릎을 누르는 압슬 형벌은 역적 죄인에게나 쓰는 형벌입니다.
전하, 신에게 무슨 역적 죄가 있길래 이다지 험하게 다스리십니까?”
”네 죄는 역적 죄 보다 더하다.
감히 임금을 능멸한 죄, 어찌 역적 죄로 다스리지 못할쏜가?”
박태보의 살 타는 연기와 냄새가 온 궁궐 안에 퍼져 갔다.
”누구랑 함께 상소문을 지었느냐?" "저 혼자 지었습니다.”
”이세화가 이미 같이 지었다고 실토했다.”
”아닙니다. 그는 저를 살리려고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숙종은 형리에게 분부했다.
“저놈을 다른 곳으로 데려가 계속 문초하라!”
그리고 사람을 시켜 박태보의 상황을 살피게 했다.
”실토 했느냐?”
”아닙니다. 입이 붙어 버린 듯 달싹 도 안 합니다.”
”죽지는 않았더냐?”
”아직 실낱 같은 숨은 붙어 있습니다.”
숙종은 한숨을 내쉬었다.
”박태보 그 놈이 본디 대쪽 같은 놈인 줄은 알았지만
이런 참혹한 형벌을 받으면서도
비명 한번 지르지 않으니 참으로 지독 하구나.”
”계속 고문 할까요?” 대신의 물음에 숙종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고문한다고 소신을 굽힐 놈이 아니다.”
”그럼 하옥 시켜 둘까요?”
”멀리 진도로 귀양을 보내라. 당장!”
진도로 귀양가는 길에 들린 노량진 친구집에서 옥독(獄毒)을
견디지 못하고 사랑하는 여인의 품 속에서 세상을 떠난다.

 

 


1417년 2월 동궁
“세자 저하!”
“누가 들어왔느냐? 들어오도록 하라!”
“신, 악공 이오방이옵니다.”
“오늘은 연회도 없는 데 악공인 네가 어인 일로 왔느냐?”
“세자 저하! ‘어리라는 여인의 이름을 들어 보았습니까?”
“어리라니? 어리가 누구인데 그 이름을 나에게 물어 보는 것이냐?
“중추부사를 지낸 곽선의 첩이온데 한양 천지에서 비교할 여자가 없을 만큼 자색이 뛰어날 뿐만아니라
재예(才藝)까지 겸비하고 있다는 소문이 장안에 파다하옵니다.”
“그래? 흐음,그렇다면 내가 어리라는 여자를 만나야겠구나.
네가 말을 꺼냈으니 당장 나가서 그 여자를 도모하도록 하라.“
“그리 하도록 하겠습니다.”
태종의 큰 아들 세자 양녕대군 이제가 악공 이오방을 만나 은밀한 대화를 나눈다.
양녕대군 이제가 세자의 자리에서 쫓겨나게 되는 비극은 이렇게 시작된다.
어리라는 여인은 곽선의 첩이었다. 엄연한 유부녀이었다.
악공 이오방의 은밀한 공작은 결코 쉽지 않았다. 이오방의 제안을 어리가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오방은 세자에 알려서 수를 놓은 비단 주머니를 선물로 주어 회유하였다.
그래도 어리는 쉽게 응하지 않았다. 어리는 곽선의 양자인 이승의 집에 찾아가서 이 일을 알렸다.
그리고 그 집에 남아 며칠간 유숙하였다. 이때 또다른 악공인 이법화가 달려가 세자에게 알리면서
이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부추겼다.
세자가 어린 환관을 데리고 대궐 담을 넘어서 이오방의 집으로 간 뒤 드디어 이승의 집에 이르렀다.
“늦은 시각에 누구요?”
“쉬이잇. 조용히 하시오. 세자 저하가 왕림하시었소.”
“아니, 세자 저하가 어찌 소인의 집에 까지....”
“어리가 이 집에 왔다는 것을 알고 찾아왔소.”
“어리는 제 양부의 첩인데... 아무리 세자 저하라고 하여도 만나게 하여 드릴 수 없습니다.”
“세자인 내가 직접 청하여도 정녕 못 만나게 하겠다는 것이냐?
어리가 있는 방으로 안내하라.”
이승이 처음에 고분고분하지 않았다. 세자가 엄포를 놓고 강요하자 어리를 만나게 해주었다.
드디어 세자는 어린 환관 이법화의 집으로 데리고 가서 하룻밤을 자고 다음날 궁중으로 납치하였다.
이 사건은 양녕대군 이제를 세자의 자리에서 쫓겨나게 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조선의 왕 인조는 백성을 버리고 황급하게 남한산성으로 피난을 간다.
그 왕의 일행은 도성을 빠져나와 한강을 건너 동남쪽으로 향하여 방이(芳荑) 마을에 이른다.
조정은 백성들의 안위보다는 정파의 싸움으로 시간을 허비하였다.
광해군을 반명(反明)으로 배반하였다고 몰아낸 그의 신하 능양군과 조선의 사대부였다.
능양군은 친명(親明) 반청(反淸)을 내세워 쿠테타를 일으켜 왕위에 올랐다.
청나라에 대한 정보도 부족하였고 외적의 침공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였다.
끝내 청나라가 전면적인 공격으로 조선을 유린하기 시작한다.
그 왕은 가족들을 강화도로 먼저 피신시켰다.
자신은 설마하다 강화도 행의 기회를 놓치고 백성을 외면하고 나선 피난 길이다.
그래도 방이마을 백성들에게 그는 여전히 나랏님이였다.
조그만 냇가가 장애물로 인조 일행의 길을 막았다.

인근 백성들은 꾸역 꾸역 모여들었다. 누가 시킨 것이 아니였다.
나랏님이 무사히 남한산성으로 피난을 갈 수 있도록 백성들이 나선 것이다.
백성들은 그저 나랏님을 위한 충정어린 마음으로 주억돌을 주워다 징검다리를 놓았다.
그 후부터는 주억돌을 주워다 놓았다고 해서 주억다리로 불리웠다.
지하철 5호선 방이역 3번 출구 앞 대림아파트 2동 샛길 입구에 주억다리와 표시석이 있다.
인조는 이 다리를 건너 남한산성으로 피난 하였다.
청나라 군인들은 이 마을을 거쳐 남한산성으로 진격해 가려고 했다.
이 마을을 지키는 병장(방이군)들이 나섰다.
이 군인들은 산을 기어 올라오는 청병들을 향해 산위에서 활을 쏘고 돌을 마구 던졌다.
청나라 병들이 못 올라오게 막어서 결국 다른 곳으로 돌아서 남한산성으로 갔다고 한다.
오랑캐를 막았다고하여 막을 방(防) 오랑캐 이(夷) 자를 써서 방이골 이라고 불리어졌다.
1914년 쯤 마을 서당에 한학을 공부한 학자들이 마을 이름의 글자의 뜻이 아름답지 못하다고 의논한다.
막을 방(防) 자는 꽃다울 방(芳), 오랑캐 이(夷) 자는 흰비름 이(荑)로 고쳐서 방이골이 되었다고 전한다.
그 후 경기도 광주군 중대면 방이리가 되었으며, 1963년 1월1일 서울시로 편입되면서 성동구 방이동이 되었다. 왕의 피난 길을 도운 백성들의 충성심이 우러나는 방이동이다.

 

 

경강(京江)은 광나루부터 시작한다.
광나루 광진(廣津) 너븐나루 모두 넓은 나루라는 뜻이다.
이 나루는 또 버드나무가 우거진 아름다운 나루 양진(楊津)라고도 한다.
이 수호신 용이 있는 용당산에는 사당 양진사(楊津祀)이 있었다.
버드나무가 우거진 광나루의 옛 모습은 오늘에 상상이 가지 않는다.

"우난 거시 벅구기가 프른 거시 버들숩가
이어라 이어라"
윤선도의 어부사시사의 일부이다.
그 시는 아래와 같이 현대적으로는 풀이할 수 있다.
"우는 것이 뻐꾹샌가 푸른 것이 버드나무 숲인가
노 저어라 노 저어라"
민요에도 버드나무는 등장한다.
"노들강변 봄버들 휘휘 늘어진 가지에다 무정세월 한허리를 칭칭 동여매어 볼까
에헤요 봄 버들도 못 믿으리로다 푸르른 저기 저 물만 흘러 흘러 가노라"
경기민요 노들강변의 가사이다.
버드나무는 시와 그림에서 자주 등장해 우리에게는 아주 친숙한 나무이다.
실제로도 우리나라 강가이나 냇가에서 자주 볼 수 있다.
경강의 양화나루는 버드나무가 무성하고 경치가 뛰어났다.
월산대군은 눈 덮인 양화벌의 겨울경치를 <양화답설(楊花踏雪)>이라 하여
<한도십영(漢都十詠)>의 한 곳으로 손꼽았다.
한강가에서도 노들강변 광나루 난지도한강공원 등 버드나무가 번성한 곳이 참으로 많다.
버드나무가 물가에 많은 이유로는 버드나무가 물을 매우 좋아하는 수인성 식물이고
잔뿌리가 땅속에서 그물처럼 서로 엉켜 강둑을 홍수등에서 보호해주고 있는 점을 든다.
또 버드나무에는 우리의 질병을 치료해주는 좋은 성분이 있어
우리 주변에서 번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3월쯤 버드나무에 물이 오른다.
어릴 때 연필 정도의 굵기 버드나무가지로 호드기 피리를 만들어 불었다.
또 봄이 오면 버들강아지를 맛있게 따먹으면서 껌처럼 씹고 다녔다.
버드나무는 정수작용이 있어서 우물가에도 많이 심어 왔다.
유럽에서도 버드나무껍질에서 추출한 살리신을 주성분으로
 해열, 진통, 소염, 심장병, 뇌졸중 등에 사용하여 왔다고 한다.
이같이 수양버들에는 해열이나 진정의 효과가 있는 살리신이 있어
겨우내 시달린 몸을 달래고 질병예방을 위해 버들피리를 불고
즐겨 일상에서 활용하였다고 한다.
인도에는 수양버들나무는 적지만 불교와는 깊은 관련이 있다.
구강 위생뿐만 아니라 일곱가지 병을 없앤다고 하는 버드나무의 약효를 중요시 했다.
석가는 제자들이 탁발이나 수행을 위해 각지를 돌아다닐 때
반드시 휴대하는 18종의 도구의 하나로  수양버들나무 칫솔을 규정했다.
이를 단타카스타 즉 치목(齒木)이라고 말한다.
양류관음상(楊柳觀音)도 있다.
버드나무 아래 바위에 앉아있거나 오른 손에 버드나무 가지를 들고
대자비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병고(病苦)를 치유하는 관음이다.
자비심이 많고 중생의 소원을 들어줌이 마치 버드나무가 바람에 나부낌과
같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버드나무는 착생률이 좋아 어떤 방식으로 땅에 심어도 뿌리를 내린다고 한다.
잔가지 속껍질을 벗겨내면 약간 튀어나온 울퉁불퉁한 목질부가 보인다.
이곳이 땅에 닿기만 하면 즉시 뿌리를 내리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서양 의학의 아버지인 히포크라테스는 버드나무껍질에서 추출한 살리신을 주성분으로 
해열, 진통, 소염, 심장병, 뇌졸중 등에 사용하여 왔다.
현재 약국에서 판매하고 있는 아스피린'의 주원료도 버드나무에서 추출한 물질이다.
아스피린은 약으로 등장된 때로부터 100년 이상이 지났어도
지금까지 강력한 해열진통과 항염증약으로서의 가치를 잃지 않고 있다.
아스피린은 진통약으로서 병적으로 높아진 체온을 떨구지만 체온을 
정상 이하로 떨구지는 않는 것이 특징이다.
 

한양의 목장성 살곶이목장

한강이야기 2012. 4. 30. 21:49 Posted by 조영희

 아차산에는 국립목장을 두르는 목장성을 있었다.
바로 국립목장 사복시(司僕寺) 살곶이목장이 아차산에 있었던 것이다.
조선 초기 태조와 태종 때부터 아차산 서쪽 기슭은 사냥터로 각광을 받았다.
역대 왕들은 뚝섬에 마련한 성덕정(聖德亭)과 화양정(華陽亭)에서 기마 군사들의 열무행사를 관람하였다. 아차산 서쪽 기슭의 국립목마장은 일명 살곶이목장이라고 한다.
태조 이성계는 왕자들 간의 골육상쟁(骨肉相爭)을 보고 환멸을 느껴 왕위를 내놓고 고향인 함흥으로 갔다. 정종도 2년 만에 임금의 자리를 내놓고 물러나자 태종이 왕위에 올랐다.
태종은 이복 동생들을 죽이고 왕의 자리에 올랐다는 세상의 이목을 생각하여
부친인 태조에게 국왕으로 인정받고 싶어하였다. 태조를 서울로 모셔 오지 않을 수 없었다.


태조 이성계를 모시러 신하를 함흥으로 보내면 태종의 행실을 노엽게 생각하는 태조 이성계는
사신이 올 적마다 죽였다고 한다. 이때부터 심부름을 보낸 뒤 돌아오지 않거나
소식이 없는 경우 ‘함흥차사(咸興差使)’라는 고사성어(古事成語)가 생겼다.
무학대사가 태조 이성계를 설득하여 서울로 모셔 오게 되었다.
태종은 태조 이성계가 서울로 돌아오자 동교(東郊), 지금의 살곶이벌에서 환영 연회를 열도록 하였다.
이때 하륜(河崙)은 연회장에 큰 차일을 칠 때 굵고 긴 기둥을 여러 개 세워 놓도록 건의하였다.
태조 이성계를 모시고 태종이 인사를 드리려 하니 갑자기 태조 이성계가 태종에게 활을 쏘았다.
태종은 굵은 기둥을 안고 요리조리 피하여 화를 면하였다.
태종이 술잔을 드리는데 하륜의 말을 쫓아 신하를 시켜 잔을 올리게 하였다.
“모두 천명(天命)이로다.”
태조가 소매 속에서 철퇴를 꺼내며 장탄식을 했다.
이 부근을 살곶이들(箭串坪)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중종반정이 일어나던 해인 연산군 12년(1506).
젊어서 서울에 역군(役軍)으로 올라왔던 어느 노인이 연산군이 살곶이다리에 거둥할 때의 회고담이다.
"나는 일곱살에 군보(軍保)에 소속되어 13세 때 비로소 서울에 번(番)을 들었는데,
그 때는 연산군이 황음해서 날마다 노는 것만 일삼았다.
연산군의 얼굴을 쳐다보니 얼굴빛이 희고 수염이 적으며 키는 크고 눈에는 붉은 기운이 있었다.
연산군이 살곶이다리에 거둥할 때 나는 역군(役軍)으로 따라갔다.
화양정 앞에 목책을 세우고 각읍에서 기르던 암말 수 백마리를 이 목책 안에 가두었다.
연산군이 정자에 자리를 잡자 수많은 기생만이 앞에 가득하고 시신(侍臣)들은 물리쳤다.
이어서 마관(馬官)이 숫말 수백 마리를 이 목책 안에 몰아넣으므로서 그들의 교접하는 것을 구경하는데
여러 말이 발로 차고 이로 물면서 서로 쫓아 다니는 그 소리가 산골짜기를 진동하였다.
그 해 가을에 중종반정이 있었다."


 

서울 도성 동쪽 들판 살곶이벌

한강이야기 2012. 4. 30. 21:16 Posted by 조영희

 아차산은 그리 높지도 빼어나지는 않다. 그래도 서울의 명산이다.
도성의 동대문 밖으로는 그 명산 아차산까지 넓은 들 살곶이벌이 펼쳐졌다.
살곶이벌은 동쪽에서 서쪽로 흐르는 한강과 북쪽에서 남쪽으로 흘러드는 중랑천이 만나는 곳에 큰 벌판이다.태조 이성계가 도읍지를 정하기 전 한양의 지리를 살필 때이다.
그는 서울 도성 동쪽 벌판 동교에 나아가 매를 놓아 사냥을 즐겼다.
이 때 응봉에서 활을 쏘자 화살을 맞은 새가 중랑포의 살곶이목장에서 기르는 말의 음료로 사용했던
도요연(桃夭淵)에 떨어졌으므로 그 자리를 살곶이라 하였다는 전설도 있다.
이 후로 새가 떨어진 곳을 ‘살곶이’ 그 주변 벌판을 ‘살곶이벌' '전관평(箭串坪)’이라 부르게 되었다.
옛부터 살곶이벌은 관중 관교 동교 등으로 불리어져 왔다.
이곳은 자연히 평야가 형성되어 풀과 버들이 무성했으므로 조선 초부터 말을 먹이는 목장이 되었다.
또한 임금의 매 사냥터로도 두드러진 곳이어서 ’동교수렵(東郊狩獵)이란 말을 남기기에 이르렀다.

 태조 이성계는 즉위 3년 아직 한양에 도읍을 정하기 전에 한양의 지리를 살필 때 동교 살곶이벌에 나가 매를 놓아 사냥을 즐겼다. 이때 응봉에서 활을 쏘았던 바 화살을 맞은 새가 중랑천 도요연(桃夭淵: 뚝섬 벌 목장 말들의 음료로 사용했던 지금의 살곶이 다리 부근)에 떨어졌다.
그 자리를 ’살곶이’라 하였다는 것이다.
태조는 다음해 3월 한강 위 지금의 응봉 기슭에 매사냥을 관장하는 응방(鷹坊)을 설치하였다 한다. 조선 왕조 정부는 이 넓은 땅을 국립 목장으로 만들었다.
이 일대가 목장이 있었음을 알려주는 지명이 아직도 곳곳에 남아있다.
과거 마장(馬場)의 안 넓은 벌판이라고 일컬어지던 장안평이다.
마장동은 조선 초기부터 숫말을 기르던 숫말목장 양마장(養馬場)이 있었는데서 비롯된 지명이다.
제주도 같은 곳에서 어렵사리 말을 한양으로 운반해오면
암말은 지금의 자양동(雌養洞: 옛이름 雌馬場里)으로 보냈다.
암말을 키우는 자마장동(雌馬場洞)이 훗날 자양동으로 바뀐 것이라고 한다.
목장 맞은편이라는 뜻의 동네 이름이 바로 면목동이다.

한양대학교 캠퍼스에는 말의 안녕을 비는 마조단(馬祖壇)의 터가 있다.
과거의 중요한 교통수단 중의 하나는 바로 말이었다. 국가적인 차원에서 말을 기르는 목장을 설치하기도 했다. 또한 말을 위해 왕이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왕이 말을 위해 제사를 지내던 곳이 바로 마조단이다.
마조단은 말의 돌림병을 예방해 달라는 목적으로 말의 조상인 천사성(선목, 마사, 마보)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마조단의 기원이 어느 때인지를 나타내는 문헌상의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고려시대부터 말의 돌림병을 예방하기위한 제사가 있었다. 고려 초기 마조단의 규모는 너비가 9보, 높이가 3자이며 사방에 출입하는 층계가 있었다. 길일(吉日)에 임금이 제사를 지냈다. 조선시대에도 이 풍습이 답습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조선시대에 어느 왕 때 마조단을 쌓았는지는 알 수 없다. 1894년 갑오개혁 이후 옛 풍습을 타파하는 정책에 따라 마조단의 제사도 순종 2년(1908)에 폐지되었다.



 

아차산 보루터에서는 서울을 감싸고 도는 한강과 중랑천이 한 눈에 들어온다.
한내 중랑천 주변 너른 들판는 아주 이른시기에  서울의 문명이 싹튼 곳이다.
한북정맥으로 이어온 망우산 봉화산과 아차산이 한양의 외청룡으로
서울의 동쪽을 병풍처럼 지켜주며 자양동 한강 앞에서 멈춘다.
그 산 기슭에는 한내  중랑천이 흐르고 있다. 가장 이른시기 구석기시기의 문명이 거기에 있었다.
망우산을 중심으로 삼각점이 되는 봉화산과 용마산 지역에 구석기·청동기 시대의 각종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이 지역에서 출토된 유물은 경희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조사된 서울시 유일의 구석기시대 유적이다. 면목동 구석기 유적은 한강 서울 유역에서 발견된 유일한 구석기 유적이다.
중랑구 면목동의 아차산 서쪽 사면 끝 기슭 면목고등학교 인근의 산기슭에 해당된다.
유적의 앞쪽으로 중랑천을 배경으로 한 들판이 펼처있어
구석인들의 일시적인 생활주거지로 좋은 여건을 형성하고 있다.
유적의 입지적 조건은 뒤에 산을 등지고 앞이 트였으며 중랑천이 이루어 놓은 들이 눈 앞에 트인 곳이었다. 유적에서는 타제석기만 출토되었다.
채집된 석기는 대부분이 몸돌석기이며 몇 개의 큰 격지석기도 끼어 있다.
특히 상봉동 봉수대에서 면목동에 이르는 지역에는 1960년대까지만 해도 토성의 흔적이 남아 있어서 후기 청동기시대 초기 철기시대의 성읍국가였음을 알 수 있다.

서울 중랑천은 한강의 여러 지류중 하나다.
경기도 양주시에서 발원해 의정부시를 거쳐 서울특별시 성동구 금호동과 성수동 1가의 강변북로 다리에서 한강과 합류하는 하천이다. 경기도부분의 중랑천은 지방하천으로 분류되며 서울특별시에 접어들면 국가하천으로 등급이 바뀐다. 또 동부간선도로 강북 구간이 서울특별시 구간부터 중랑천과 나란히 뻗어있다. 중랑천의 위치와 옛날 중랑천은 길이 20km. 최대너비 150m. 유역면적 288㎢.
큰 내 한천 중랑천은 총13개의 지류를 지니며, 총길이는 45.3㎞나 되는 서울의 어느 하천보다도 길다.중랑천 주변은 높이 348m의 용마산을 비롯하여 280m의 망우산, 177.9m의 구릉산,
137.9m의 봉화산 등이 오랫동안 침식을 받아서 산맥이 낮아진 구릉지로 형성된 곳이다.
백제시조 온조는 졸본지역에서 한강 유역인 위례성에 도읍을 정했다.
노중국 교수(계명대 사학과)는 한강유역의 첫 도읍은 중랑천 근처라고 주장한다.
졸본(환인지방)을 출발한 온조 일행은 개마고원을 넘어 원산지역으로 내려와
그 곳에서 추가령구조곡을 타고서 한강유역에 이른 것같다. 그때가 기원전 18년이다.
이때 온조 일행이 백제 최초의 왕성 하북위례성 터를 잡은 곳이 중랑천 주변이라는 것이다.
오늘날 서울 동대문구 중랑구 성동구 일대 중랑천변이 하북위례성이 들어섰던 곳이라는 주장이다.
“하북위례성의 옛 자리는 경성 동북쪽 십리되는 곳 삼각산 동록(東麓)에 있다.”
다산 정약용(1762~1836년)이 그의 저서 <여유당전서> ‘강역고’에서 주장한 내용이다.
삼각산 동쪽 기슭을 세검정 계곡 일대로 해석하는 학자도 있다.
 "내 생각은 지금의 서울 청계천을 끼고 있는 중랑천 청계천을 끼고 있는 지금의 수도 위치가 아닌가.고려시대 때도 남경은 바로 그 한양부라는 데가 바로 지금의 도성 안에 있었기 때문에
옛날 도성이었던 데서 계속 성장 발전했다고 생각되지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다고 생각돼요.
지금 부아악이라는 것도 북악산이라고 한다면 청와대 뒷산인데
바로 그 지역이 아니었는가 하북위례성이."<이형구선문대교수>
<삼국사기>에는 백제의 온조가 재위 14년에 낙랑과 말갈의 잦은 침략을 피해서 하북위례성에서
한수의 남쪽인 한산 아래 하남위례성으로 천도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위례성을 중랑천 주변에서 하남으로 옮긴 것은 천도로 보기 어렵다는 주장이 나온다.
"중랑천이나 세검정에 둔 하북위레성에서 바로 코앞의 하남으로 도읍지를 옮긴 것을 두고
천도라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문화재연구소에서 고구려의 적석총 무덤이 발굴된 한탄강 유역이
오히려 하북위레성일 가능성이 높다."(임영진 전남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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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하, 시원하시겠습니다."

한강이야기 2012. 4. 22. 08:44 Posted by 조영희

아차산 앞쪽으로 자리잡고 있던 광나루에서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면서 아차산을 바라보던 광경은 한 폭의 그림과 같다.겸재 정선의 그림 광진에 보면 층층이 쌓인 아차산 아래로 고관들의 별장들이 즐비한 것을 볼 수 있다.아차산 자락 광장동 일대는 이미 조선시대부터 명사들이 자주 찾던 명승지였음을 알 수 있다.
1950년대까지만 해도 한강변에서 가장 아름다운 명소로 이승만 대통령의 별장이 위치해 있었다.
지금은 세라톤 워커힐 호텔이 들어선 곳이다. 1950년대까지도 한강변에서 가장 아름다운 명소로 존재하였던 아차산 자락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별장이 있었다.
"1961년 하반기 대규모 호텔을 조성할 곳으로 이승만 대통령의 한강변 별장터가 선정됐다.
부지 면적은 19만1천여평. 이대통령은 가끔 이곳에 들러 낚시를 즐겼다고 한다.
울창한 아차산을 등진 이곳은 한강의 흐름과 넓은 들녘이 한눈에 들어오는 절경이었다."
(손정목 서울시립대 명예교수)
많은 이들이 아차산과 광나루 일대의 풍광을  그림과 시로 읊기도 하였다.
근현대 이후에 서울로 인구가 집중되면서  아차산 기슭 중턱까지 주택이 들어서게 되었다.

이승만대통령은 낚시를 즐겼다.
휴가때 진해 별장이나 화진포 별장에서 낚시하는 이승만대통령부부의 사진을 볼 수 있다.
이 사진은 별장에서 이대통령이 낚시하는 모습이다.

"각하, 시원하시겠습니다."
유옥우 의원의 1956년 국회발언에서 나온 말이라고 한다.
“이승만대통령이 광나루에서 특별선박을 내어 낚시질을 할 때 방귀를 뀌자
당시 경기도지사였던 이익흥 내무장관인 ‘각하 시원하시겠습니다’라고 말했는데,
아부질 잘하는 그런사람이 대통령을 보필을 하고 장관노릇을 한다고 하면 대한민국 명의가 서겠느냐!”
이 승만대통령의 눈을 가리고 귀를 막아 인의 장막을 치고 아부와 과잉충성이 극심했던 시절이다.
그로부터 <각하 시원하시겠습니다.>라는 이 말은 이승만대통령에게 아부하는 사람들의 본질을 드러내는 말로 널리 쓰였다.

이익흥내무장관과 관련한 기사를 찾아 볼 수 있었다.
<정운현의 역사에세이>에서 이익흥내무과 관련한 내용과 사진을 그대로 옮겨본다.
"오랜만에 자료 파일을 뒤적여 수 년 전 고서점에서 구입한 전단지 가운데 하나를 찾아냈습니다.
손바닥만한 크기의 이 전단지는 말하자면 ‘초대장’입니다.
행사 일시는 1955년 6월 15일, 장소는 남한산성 서장대, 초청자는 당시 경기도지사로 있던 이익흥(李益興)입니다. 주최측은 이날 교통 편의를 위해 당일 12시 30분 정각에 경기도청 정문 앞에 버스를 준비해뒀습니다.
그리고 참석자는 당일 이 전단지(사실상 초대장)를 지참하고 참석하랍니다.
대체 무슨 행사길래 남한산성에서 행사를 열었으며, 또 초청자가 경기도지사였을까요?
<대한뉴스> 제59호(1955년 7월 4일 제작)에 따르면, 이날 행사는 ‘이승만 대통령의 송수탑 건립과 제막식’이었습니다. <대한뉴스>는 6월 15일 오후 ‘유서 깊은 남한산성에서 일각’에서 이승만 대통령 송수탑 제막식이 성대히 열렸다고 보도했습니다.

이날 행사장에는 함태영 부통령 및 정부각료, 내빈들 참석했으며 변영태 외무부장관과 내외 요인들이 축사를, 송수탑 건립위원장인 이익흥 경기도지사의 송수탑 건립 경과보고를 했습니다.
이어 인천여고 학생들이 이승만 대통령의 만수무강을 비는 합창을 했다고 보도했더군요."
실제로 이승만 대통령의 권위로 인해 주변에는 아첨꾼들이 들끓었다.
당시 이승만대통령에게 아부하는 것을 빗대 '사바사바'라는 일본어가 회자되었다.
지금도 아부의 표현으로 일반 국민들 사이에서 여전히 '사바사바'가 통용되고 있기도 한다.

 

 

서울 강(京江 Seoul River)

한강이야기 2012. 4. 7. 20:55 Posted by 조영희

 

한강은 태백산과 금강산에서 발원하여 서해까지 이르는 긴 강, 한강이다.
한강은 한반도의 한복판을 흐르면서 한반도 역사의 중심 무대가 되었다.
한강 전체 물길 중에서 서울을 끼고 도는 부분을 특히 '경강(京江)'이라 불렀다.
한양 도성 앞을 흐르는 강을 서울강(京江 Seoul River) 이라고 했다.경강은 총길이 514㎞인 한강 중 한성부가 관장하던 곳이다. 한양의 외청룡 아차산이다. 그 아차산 자락 한강나루가 광나루 광진이다.

광나루 광진에서 양화진까지의 한강을 서울강 경강이라고 한 것이다.그 경강은 동호 한강 서강 용산강 마포강 행호 등으로 달리 불리었다.경강은 조선후기 전국 해상 수상 교통과 운송의 중심지이었다. 전국에서 몰려드는 각종 물화를 서울로 공급하는 창구 역할을 했다. 남한강과 북한강이 양수리에서 만난다. 한강 윗쪽이 북으로 왼쪽 동쪽 은 외사산 외청룡 아차산으로 이곳을 흐르는 이 한강의 본류를에 있는 산이 한양의 외청룡 아차산이다.아차산 동쪽 끝자락에 광나루터가 있었다.

경강은 18세기 이전까지 3강으로 불리었다. 한강 용산강 서강이 한양의 기본 3강이었다. 남산 남쪽 한남대교 근처에서 노량진까지를 한강, 그 서쪽에서 마포까지를 용산강, 마포 서쪽에서 양화진까지를 서강이라 불렀다. 이들 3강은 조선전기부터 경강수운의 중심지이었다.조운에 의한 세곡 운송의 거점이면서 동시에 서울과 다른 지역을 연결하는 나루터로서 중요 교통로에 해당하였다.지금의 한남대교 부근에서 노량진까지를 가리키는 한강지역에 속하는 두모포에서는 한강 상류에서 내려온 물자가 집하(集荷)되어 서울로 반입되었다. 두모포 아래에 위치한 한강진(구철 한남역 자리)은 경기도 광주로 건너갈 수 있는 나루터로서 서울의 물화가 삼남지역으로 내려가는 중요한 길목이기도 했다. 남서쪽에서 마포까지를 가리키는 용산강 지역은 경기도, 충청도, 강원도, 경상도 등지의 세곡을 모아 한강 수운을 따라 상류에서 실어온 다음 부려 놓는, 내륙수운에 의한 조운의 종착점이었다. 한편 조선전기에는 바닷물이 용산강까지 들어왔기 때문에
서해를 통해 올라온 조운선까지 모여들어 이곳은 조운의 중심지로서 조선초기부터 발전하였다. 그러나 조선후기에는 용산강의 수위가 점점 낮아지고 강바닥에 진흙이 쌓여
바닷물이 들어오지 않게 되어 서해를 통해 올라온 조운선 역시 용산강 하류인 마포나 서강까지만 들어오게 되었다. 한편 용산강의 하류에 위치한 마포는 서해안과 한강 상류를 연결하는 상업의 요지였다. 서강과 용산이 조세곡 운송의 중심지였다면 마포에는 세곡이 아닌 일반 상품들이 집하(集河)되어 매매되었기 때문에 이곳은 어물과 상품유통의 중심지로서 번창하였다.마포서쪽에서 양화진에 이르는 서강지역은 바다를 통해 경강으로 반입되는 황해도, 전라도, 충청도, 경기도 등지의 세곡이 모이는 곳이었다. 서해를 거쳐 운송된 조세곡은 일단 서강에서 하역되었다가 배나 짐말, 짐꾼에 의해 다시 경강변이나 도성 안의 각 창고로 운반되었다. 조선후기에는 조운선이 용산강까지 올라갈 수 없었기 때문에 서강지역이 세곡운송의 중심포구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18세기 중엽부터 5강으로 불린 경강지역은, 한강 서강 용산 마포 망원정이었고 18세기 후반 이후의 8강에는 5강의 두모포, 서빙고 뚝섬이 더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