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6월 25일 북한이 남침을 감행했다.
국군은 계속 북한군에 밀려 개성 철원 의정부 방어선이 차례로 무너졌다.
19050년 6월 28일 새벽 미아리 방어선도 무너졌다.
국군은 극도의 혼란 속에서 철수를 시작한다.
28일과 29일 사이 한강 남안에서 철수병력의 집결을 완료할 수 있었다.
서울을 상실한 국군에게 한강은 방어에 가장 양호한 지형이었다.
이제 한강선은 국군이 적을 어떻게 방어하느냐에 따라
이 국가의 존망이 결정될 만큼 중요하게 되었다.
채병덕 총참모장은 한강을 연한 방어선에서 적의 진격을 저지하기로 결심한다.
육군참모학교장 김홍일 소장을 시흥지구전투사령관으로 임명하고 한강선 방어임무를 맡겼다.
서울이 함락되자 채병덕 육군총참모장은 6월 28일 낮 12시.
육군본부를 수원으로 이전하고 한강방어를 위한 조치를 취한다.
채 총참모장은 육군참모학교교장인 김홍일 장군을 총장실로 불러 한강방어를 요청한 것이다.
“선배님! 아군이 기사회생할 수 있는 길은 한강을 방어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김홍일 장군은 채 총참모장의 제안을 기꺼이 수락했다.
“총장님! 그동안 고생하셨습니다. 소관이 신명을 바쳐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8.15광복 당시 채병덕 총장은 일본군 소령 계급이었다.
김홍일 장군은 중국의 장개석의 신임을 받았던 중국군 소장 출신이었다.
채 총장은 김홍일 장군이 나이로도 약 20년 차이가 났기 때문에
군의 대 선배로 깍듯이 대접한 것이다.
김홍일 장군은 채 총장의 진정성이 넘치는 부탁에
승산이 없는 싸움인 줄 뻔히 알면서도 국가를 위해 그 제의를 기꺼이 받아들인다
1950년 6월 28일부터 7월 3일까지 최악의 상황과 조건이었다.
그럼에도 김홍일장군은 한강선 방어를 책임지는 시흥지구전투사령관에 임명되어
한강선 방어의 책임을 수행하게 된다.
개전 3일 후인 6월 29일 도쿄에서 극동군 사령관인 맥아더 원수가
그 상공에서 공중전이 벌어지고 있는 수원비행장에 착륙했다.
맥아더 원수는 수원비행장에까지 친히 영접을 나왔던 이승만 대통령을 만나
요담을 나눈 후 시흥지구 전투사령부 김종갑 참모장의 안내를 받아
곧장 70세 노구로 지프차를 몰아 한강방어선을 시찰하였다.
그의 방문목적은 한국전황을 직접 살펴보고 지상군 파병의 필요성을 검토하기 위함이었다.
북한군의 막강한 일방적 포격을 받고 있는 영등포의 제8연대본부에 와서
적진을 쌍안경으로 직접 관찰하기도 하였다.
개인호에서 진지를 지키고 있던 병사를 발견하고 가까이 다가가 직접 대화를 나누었다.
그 병사는 맥아더 원수의 질문에 망설임 없이 대답한다.
"직책이 무엇인가?"
"분대장입니다."
"언제가지 여기를 지킬 것인가?"
"소대장의 명령이 있을 때까지 지킬 것입니다."
"명령이 생명보다도 중요한가?"
"네. 그렇습니다."
"끝까지 명령이 없을 때는 어찌할 것인가?"
"죽을 때까지 싸우겠습니다."
"죽는 것이 두렵지 않은가?"
"두렵지 않습니다."
"음.. 알았다. 무엇인가 필요한 것은 없는가?"
"네. 우리는 지금 (M1)소총밖에 없습니다.
적의 전차와 대포를 때려잡을 수 있는 무기가 필요합니다."
"그밖에는?"
"없습니다."
"음... 내가 여기 온 보람이 있었다.
내가 돌아가서 바로 미군 자상병과 병기를 보내주겠다.
용기를 잃지 마라."
맥아더 장군은 그 병사와의 약속을 결코 저버리지 않았다.
맥아더 장군은 한강선 시찰을 마치고 김홍일 장군에게 묻는다.
“김 장군! 지금 한강방어선은 언제까지 방어할 수 있습니까?”
김홍일 장군은 자신 있게 결연한 의지로 답변했다.
“공격과 방어의 배수 원칙을 감안할 때
앞으로 열흘 정도는 지탱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현재 한강선 도처에서 한국군이 적의 보병이 도하해 오는 것을 단호하게 격퇴시키고 있습니다.
보병끼리의 전투에서 한국군이 적에 비해 단연 우세합니다.”
맥아더 장군은 김홍일 장군의 정연한 답변에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하는 듯 했다고 한다.
맥아더장군은 한강선 시찰결과 전문을 30일 새벽 3시 미 국방부에 보낸다.
“한국전선을 시찰한 결과 한국군은 붕괴되었으며
한강방어선을 고수하고 실지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미 지상군 투입이 불가피하다.”
백악군은 그날 오전 11시 공식성명을 발표한다.
“북한 침략자를 격퇴시키고 한국의 평화를 회복시키는 데
대한민국을 지지해 달라는 유엔안전보장이사회의 요청에 응하여
트르먼 대통령은 미 공군에게 군사적으로 필요하다면
북한의 어떤 군사목표에 대해서도 공격을 수행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고
한반도의 전 연안의 해상봉쇄를 명령했다.
맥아더 장군에게는 확실한 지상부대를 사용할 권한을 부여했다.”
그리고 다음날 맥아더 원수는 긴급전보로 트루먼 대통령에게
재일(在日) 제8군의 2개 사단 병력 출동을 요청하여 승낙을 받았다.
맥아더 원수가 아니고서는 미국의 본격적 참전이
이렇게 급진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1950년 6월 28일 오전 2시 30분 한강 인도교와 철교가 폭파됨으로써
한강 이북의 수도 서울은 완전히 북괴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아군은 한강이라는 자연적인 장애물을 이용하여
저지선을 구축하고 북괴군의 도하를 막게 되었다.
김홍일 사령관은 유재흥 준장을 제7사단장에 임명하여 노량진 방면에 배치했다.
이종찬대령을 수도사단장으로 임명과 동시에 영등포 방면에 포진케 하였다.
한강 저지선의 서쪽에서는 김포지구 전투사령부가 김포 비행장과 오류동 일대에서
북괴군의 진출을 억제하며 측면 지원을 하고 있었다.
서울을 점령한 북괴군은 제3사단 제4사단 제105 전차여단에게
‘서울사단’이라는 칭호를 부여하는 등 기세가 등등했다.
미군을 포함한 국제연합군이 내원하기 전에 국군의 주력 부대를 섬멸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6월 29일 밤부터 북괴군은 한강 도하작전을 시작하였다.
북괴 제3사단은 30일 새벽에 서빙고에서 도하하여
동작동과 흑석동을 잇는 고지로 진출을 시도하였다.
그들의 계획은 노량진 부근의 고지대를 장악하여
그 엄호 아래 폭파에 실패한 한강철교를 이용하여 전차를 도하시키려는 것이었다.
여기에서는 북괴군이 전차의 지원을 받지 못한다는 사실에
고무된 우리 국군은 대등한 조건 속에서 북괴군 제3사단을 공격하여
커다란 타격을 가하면서 7월 3일까지 그들이 한강을 건너지 못하도록 저지하였다.
영등포 방면에서는 국군 제8연대와 제18연대의 일부 병력이
6월 27일부터 7월 3일까지 수차례에 걸쳐 북괴군의 공격을 격퇴하면서 여의도를 확보하고 있었다.
북괴군은 불완전하게 파괴된 한강의 복선철교를 수리한다.
마침내 7월 3일을 기하여 전차를 도하시키고 이를 앞세워 영등포 방면으로 진출하기 시작한다.
국군의 한강 저지선은 붕괴되고 서울은 완전히 공산군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었다.
김홍일장군의 시흥지구전투사령부는 한강방어선을 6일동안이나 지켜냄으로써
국군이 전열을 정비할 수 있었다.
미국이 한국전에 참전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얻어내는 기대이상의 큰 성과를 거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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